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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대표하는 한석봉 천자문

정부혜 2022. 1. 23. 17:14

조선을 대표하는 한석봉 천자문

 

한호 書, 허균 讚 <사명대사석장비명(四溟大師石藏碑銘)> 탁본 1612년 건립, 부분.

 

천자문》

 

한석봉이 우리들에게 특별한 점은 천자문 교본을 써서

어린아이들부터 모든 글씨를 배우는 이들이 그를 통해 바르게 익히게 했고

이것이 엄청난 영향력인 것이지요. 추사는 그런 폭넓은 영향력은 없습니다.

 

한석봉 천자문은 여러 판본이 전해지는데 행서 대서(大書)와 소서(小書),

그리고 초서 천자문이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귀거래사 등의 글씨를 쓴 서첩을

많이 써서 남겼기 때문에 그 영향도 오래 지속됐습니다. 서첩으로 만들어져 교과서처럼

돌려본 글씨는 중국의 송설, 왕희지등을 제하면 한석봉의 것이 절대적인 양을 차지했습니다.

1700년 이후 조선시대 내내 이 현상이 지속되어 1950년, 60년대까지도 그 효과가 남아 있었습니다.

해서천자문 1583년 목판본 43x28.5cm (1694년 중간본)

초서천자문 1597년 목판본 25.5x18cm (1861년 중간본)

 

한석봉이 추사에 비해 점수를 많이 얻는 분야가 바로 이런 점이지요.

추사의 생각, 이론이 조선말기를 지배했던 것은 추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재로서 청나라 문인에게 인정받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점 때문입니다.

 

. 추사의 이론은 높은 경지를 추구한다고 해야 할까,

천재들이 이어가야 하는 생각이었고 제자들은 그 근처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사람들은 그를 추앙하고 넘어서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는데, 만약 좀더 실용적인

측면의 철학으로 이를 극복하고 움직였다면 조선의 마지막이 그런 모습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호는 술을 좋아하여 많이 마신 것으로 전해집니다.

집안의 한계와 다른 사람들의 시샘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술로 풀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지은 것으로 고향 동네 봉우리인 ‘석봉’에 작은 초가를 짓고 그 내력을 적은

「석봉청묘초려시서(石峯淸妙草廬詩序)」라는 글은 글씨도 좋고 문장 또한 명문입니다.

 

<석봉청묘초려시서> 오송정五松亭 6首, 1598년, 지본묵서, 27.5x15.2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