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편지1
하늘 향한 그리움에
눈이 맑아지고
사람 향한 그리움에
마음이 깊어지는 계절
순하고도 단호한
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용서하며
산길을 걷다 보면
툭, 하고 떨어지는
조그만 도토리 하나
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
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 이해인
가을 사랑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 도종환
가을 엽서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
세상에 나누어줄 것이 많다는 듯이
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 할지라도
그대여
가을 저녁 한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 안도현
갈대
언젠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 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김사인
일말의 계절
아무도 밟지 말라고 가을이 오고 있다
무엇이든 훔치려는 손을 내려 놓으라고 가을은 온다
힘 빠지는 고요를 두 손으로 받치듯
무겁게 무겁게 차오르는 가을
가을이 와서야 빨래를 한다
가을이 와서 부엌 불을 켜고 국수를 삶다가
움켜쥔 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도록 내버려둔다
먼 길에서 돌아와 듣는 오래 전에 남겨진 메시지
우편물이 반송되었으니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마련할 것이 없으므로
생에 단 한 번 우체국을 찾아 보낸 것이 있다
계절이 오는 것도 다 받아내지 못하는 우체국으로 보낸 것이 되돌아왔다
되돌려 받기를 잘했다
괜히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생의 부분을 보냈다
파는 것인지 가져가라는 것인지
길 앞에 쌓아 놓은 가을 낙과를
하나쯤 가져가도 좋겠다
- 이병률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 나태주
불편과 고독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살며시 세상을 빠져나와
홀로 외로움을 껴안아라
얼마나 깊숙이 껴안는가에 따라
네 삶의 깊이가 결정되리니
불편함이 찾아올 때면
살며시 익숙함을 빠져나와
그저 불편함을 껴안아라
불편함과 친숙해지는 만큼
네 삶의 자유가 결정되리니
불편과 고독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것
불편과 고독의 날개 없이는
삶은 저 푸른 하늘을 날 수 없으니
굽이 도는 불편함 속에 강물은 새롭고
우뚝 선 고독 속에 하얀 산정은 빛난다
- 박노해
가을 바람
가을 바람은 그냥 스쳐가지 않는다
밤별들을 못 견디게 빛나게 하고
가난한 연인들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헤매는 거리의 비명과 한숨을 몰고 와
어느 썰렁한 자취방에 슬며시 내려 앉는다
그리고 생각나게 한다
지난 여름을, 덧없이 보낸 밤들을
못다 한 말들과 망설였던 이유들을
성은 없고 이름만 남은 사람들을
낡은 앨범 먼지를 헤치고 까마득한 사연들이 튀어 나온다
가을바람 소리는 속절없는 세월에 감금된 이의
벗이 되었다 연인이 되었다
안주가 되었다
가을 바람은 재난이다
- 최영미
그냥 좋은 것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면
어느 순간 식상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별히 끌리는 부분도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 때문에 그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가 좋아 그 부분이 좋은 것입니다
그냥 좋은 것이
그저 좋은 것입니다
- 원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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