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소소함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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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의 사랑이야기

정부혜 2021. 4. 27. 09:56

정주영 회장에게는 살아생전 꿈에서도 잊지 못할 세 명의 여인이 있다 합니다.

그 세 사람은 정주영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이라 하네요.

한 분은 본부인 변중석 여사 그리고 다른 한 분은 서울에서 단골로 드나들던 요정마담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정주영의 첫사랑 고향 통천에 이장집 딸이라고 합니다.

국내 최대 재벌이라 불렸던 정주영 회장 인생을 통틀어 이 세여인이 그의 마음에 깊이 싶이 자리 잡았고 한평생 사랑했던 여인이라 합니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본부인 변중석 여사를 "살아있는 천사"라고 했어요.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대식구를 잘 거느렸지요.

매일 자정이 되어서 귀가하는 정주영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어요.

남편 얼굴은 저녁에나 잠깐 볼 뿐 그는 매일 일복(속칭‘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없는 맨얼굴로 날마다 본사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하기도 했지요.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도 맡았으며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하네요.

변 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이라고 불렀다고 하지요.

정주영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 대해 물어 보면 “자신보다 열배는 더 부지런한 분이시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심지어정 주영회장이 핏덩이를 자식이라고 그것도 두 번씩이나 데리고 와“잘 키우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지요.

그녀는 정회장 곁에서 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진정한 조강지처였지요.

정주영 회장도 자서전에서 생전에 재봉틀 한 대와 장독대 항아리를 유일한 재산으로 여겼던 아내는 부자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고 젊은 시절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며 지내면서도 불평불만 하나 내색하지 않고 집안을 꾸려준 아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고 회고했어요.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나타났지요.

낙동강 고령교 복구공사에 자신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갑자기 몰아닥친 홍수와 부족한 장비 그리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지요.

이로 인해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이 난 상태였어요.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을 하여 공사는 중단되었고 전재산을 모두 쏟아부었지만 역부족이었고 사채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지요.

그래서 정회장은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때마다 자금을 지원해 주었지요.

정회장이 접대를위해 자주찾은 그 요정은 당시 서울에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인데다가 여전(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어요.

평소 단골손님이었던 정회장의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는데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못할 정도로 수줍어했다네요.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는데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 회장에게 “한번 꼭 보고 싶다..이번에는 직접 와 달라..서울에 꼭 다녀가라..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것이다”라고 했다네요.

그렇지만 "사업이 망해가고 있어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는데 평소보다 세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어요.

정 회장은 그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어요.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지요.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시기를 바란다"는 말과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내용이었어요.

편지를 받은 정회장은 한걸음에 달려갔지만 그녀는 벌써 자살한 뒤였다하네요.

좋아했던 정회장을 위해 요정마담은 계속해서 큰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지요.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났어요.

정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를 내려오면서 오인보와 함께 목놓아 울었다네요.

정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다시 일을 시작했지요.

사업 실패를 코앞에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죽음은 생사 기로에 섰던 정회장에게 심기일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녀를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었다네요.

그러면서 그녀가 유언으로 남긴 교훈을 뼛 속깊이 새기며 매사 ‘하면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다는군요.

그 여인이 없었으면 오늘의 현대도 없다할 정도로 큰 힘을 보태준 여인으로 정주영의 가슴에는 늘 그 여인의 고마움이 대 못처럼 박혀있었지요.

정주영은 가끔 힘들고 지칠 때면 그녀의 묘를 찾아 위안을 받았으며 언제나 돌아올때는 눈물범벅이 되었다하네요.

못다 이룬 고매한 사랑의 아픈 눈물이었을까요?

자신을 살리고 대신 죽어준 한 맺힌 통한의 눈물이었을까요?


●그리고 마지막 여인은 정회장의 첫사랑이었는데 마치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같이 정회장의 마지막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지요.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어요.

경성(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는데 정 회장은 매일 새벽4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 일을 하여 녹초가 된 몸인데도 이장집에 가서 동아일보와 이뿐 소녀를 만난다는 생각만하면 20여리 떨어진 집이지만 100m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회장은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소설"흙"을 읽으며 주인공 ‘허숭’처럼 경성에 가서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이는 두 살이나 더 많은 이장집 딸에게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문을 전달할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지요.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길인 냥 황홀했다 하네요.

소설, '흙'과 이장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어요.


광복 이후 6,25전,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서 꽤 큰 돈을 벌었어요. 그리하여 정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으로 갔어요.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도 사서 신고 모자도 사서 쓰고 좋은 시계도 사서 차고는 친구 김영주와 함께 들뜬 마음으로 고향 통천에 가서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는 벌써 결혼을 하여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어요.

처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실망을 느꼈지만, 그녀가 신랑을 소개해 주면서 밥을 차려주었는데 정회장은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그 집에서 마련한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그녀 생각에 잠을 한 숨도 이루지 못했대요.

아침 식사대접을 한 번 더 받고 준비한 선물을 준 뒤 헤어졌는데 이것이 마지막일 줄이야.

6.25전쟁으로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뀌고 난 뒤엔 왕래가 자유롭지 않게 된 게예요.


그 후 오랜 세월 이장집 딸,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은 채로 67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어요.

정회장은 꿈에서도 잊지 못한 그 첫사랑이 너무도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통일소를 이끌고 직접 가서 만나기로 결심했지요.

그러나 이때는 북한의 협조가 너무 늦어 만나질 못하였지요. 그리고 2년후 다시 북한을 가게 되었어요.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했대요.

첫째는 국가와 민족의통일이고 두 번째는 첫사랑 때문이라 했어요.

그는 이익치회장보고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꼭 찾아달라는 부탁을 직접하라’고 지시했지요. 그러면서 김정일에게 부탁하여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산책을 하겠다는 소망을 내비쳤어요.

또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지요.

이회장은 정회장의 지시에 따라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70억 원에 매입했어요.

매입한 집을 새로 단장하며 2층에 침실을 꾸미고 그날부터 정회장은 꿈에 부풀어 가회동에서 기거했지요. 늦었지만 첫사랑 이뿐이를 데려와 함께 살 꿈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녀의 집 사랑방에서 밤을 지새우던 그때의 생각이 되살아난 것이지요. 정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꿈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지요.


2000년 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어요.

정씨 일가의 경영일선 퇴진과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지요. 정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 건강문제로 이어졌어요.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첫 사랑 여인이 안타깝게도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게 돼요.

그토록 오매불망(寤寐不忘) 꿈에 그리던 여인이었는데 허무하게 죽었다니...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내가 이렇게 데리러 왔는데!!...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당국이 총동원되어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는데 그녀는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나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과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해 들었지요.

충격에 빠진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으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무슨 병으로 죽었느냐? 살기는 잘살았느냐?

그러면서 정회장은 “2년 전에만 만났다면 자신이 만든 아산병원에 데려가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늦게 왔다”며 자책 아닌 자책을 많이 했다 하네요.

그리고 그 가족들을 만나 ‘어머님은 훌륭하신 분’이라는 말과 함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분이니 기일 때마다 제사 거르지 말고 잘 모시라고 당부하고 그녀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많은 선물들을 그들에게 전하고 김정일 위원장에게는 저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후손들을 잘 부탁하고 왔다 하네요.

그 후 정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어요.

그러한지 몇 달 후 정주영 회장은 눈을 감았지요. 2001년 3월 21일에 그도 눈을 감았지요.
아마도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했고 결국 그녀를 찾아 그녀 곁으로 갔는지도 몰라요
어때요 가슴이 뭉클하지요?
그래서 천하의 난봉꾼도 순정은 있다 했어요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