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왕조실록
■ 대왕 태조왕건 877년-943년 재위기간 918년-943년. 25년●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본관 개성.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 배현경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 《계백료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개성)이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政誡 1권과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 며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大匡 朴述熙에게 훈요 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건국초기 왕건은 정주유씨, 평주유씨, 경주김씨, 황주황보씨, 광주의왕씨, 충주의유씨 등 지방호족 딸들과 정략적으로 혼인했다. 거란과는 적대관계 - 942년 10월 거란이 사신 30여명과 낙타50필을 보내와 고려와 화친을 제의하나 단호히 거절함. 왕건은 일찍이 거란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써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 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은 섬에 귀양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다리 밑에서 굶겨 죽였다.
● 최응 [898~932]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黃州. 시호 희개.
五經에 밝고 문장이 뛰어나 궁예 밑에서 한림랑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신덕왕 4) 궁예가 왕건에게 모반의 누명을 씌 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로 그 자리에 있던 최응이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가, “굽히지 않으면 위태다”고 왕건에게 귀띔, 굴하게함으로써 화를 면하게 하였다. 그 후 왕건이 즉위하자 지원봉성사를 지내고, 이어 광평낭중 ·내봉경 ·광평시랑등을 지내면서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대광 태자태부 ·사도에 추증,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고려개국공신 4인방
홍유 : ? - 936년 홍유의딸이 왕건의 제26비 경북 의성 출신.
배현경 : ? - 936년 경주출신.
신숭겸 : ? - 927년 전남 곡성출신. 3세때 춘천으로 이사 호는 능산 본관은 평산 평산신씨 의 시조. 왕건과 사냥을 나갔다가 기러기 3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중 3째 기러기의 날개를 맞춰 보라고 해서 신숭겸이 화살로 기러기 날개를 정통으로 마치자 왕건은 그 자리에서 전답 3백 결을 내리고 평산 신씨라는 성을 내렸다. 공산전투 때 왕건을 대신하여 왕건의 복장을 하고 싸우다가 전사함.
복지겸 : ? - ?
● 훈요십조 : 943년 병상에 누워서 후대 왕 들이 명심해야함 10가지를 박술희 에게 구술함.
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쟁탈을 금지할 것.
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3.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4.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5. 서경에 일 백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6.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 하지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7. 상벌은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8. 차령산맥이남 공주강 외각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9.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졸병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 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 원 왕실과 혈연관계를 조작한 고려왕실
김관의의「편년통록」에 실린 왕건 조상들에 얽힌 이야기에 따르면 왕건의 아버지는 왕륭이며 할아버지는 작제건, 증조부는 당나라 숙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을 때 원나라 한림학사 한 사람이 왕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듣건대 대 왕의 조상은 당나라 숙종황제 에게서 태어 났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서 근거한 말입니까? 사실 숙종은 어려서부터 한 번도 대궐 밖으로 나간 일이 없고 안록산의 난이 있었던 때에는 영무에서 즉위 하였으니 어느 틈에 조선에 가 서자식을 둘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충선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편년강목의 저자인 민지가 대신 대답을 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사가 잘못 쓰여진 것입니다. 사실은 숙종이 아니고 선종 이었습니다. 민지가 숙종을 선종으로 고쳐야 한다고 말하자 한림학사는 선종은 안록산의 난 때(753년) 오랫동안 외방에서 고생하였던 만큼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수긍했다. 하지만 고려왕조의 선조가 선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제현은 잘못된 이야기라고 논박하고 있다. 즉, 선종이 비록 난리통에 동방으로 왔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지 하나의 민담에 불과할 뿐, 실록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제현의 주장 대로라면 고려 왕실이 당의 왕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김관의나 민지는 왜 고려왕실을 당나라 왕족과 연관시키려 했던 것일까. 당이 멸망하자 수많은 국가들이 난립했지만, 당의 문화와 전통은 여전히 중국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이 당 왕실과 혈연관계 있다는 것은 외교적 측면에서 유리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고려왕실은 이러한 이점을 계산하고 의도적으로 당 왕실과의 혈연관계를 조작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원의 팽창으로 송의 입지가 약해지고, 결과적으로 송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 왕실의 입지 역시 약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고려 왕실은 왕족의 권위를 세울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고, 그 결과 당 왕실과의 혈연관계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려 중엽 당시에는 이러한 혈연 조작이 여러모로 쓸모있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대 이후 반원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더 이상 당 왕실과 혈연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원의 몰락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던 중국의 정세를 틈타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일어나면서 고려는 당 왕실과의 혈연 조작 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이 고려왕실과 당 왕실의 혈연 조작을 강하게 비판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 제2대왕 혜종 912년-945년. 재위기간 943년-945년. 2년 34세 사망.
● 왕자무의 태자책봉을 둘러싼 역학관계
고려실록이 처음 편찬된 것은 제8대 현종 때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도 함께 소실되었다. 실록편찬은 바로 이때 소실된 사료의 복원차원에서 1013년 9월 현종의 명으로 '칠대 실록' 편찬에 착수한다. 사초 소실로 과거사를 알 수없자 나이 많은 노인을 찾아다니며 사료수집 작업을 벌이고 사료수집이 완료되자 그것을 토대로 '7대실록' 이 편찬되었다. 고려실록 편찬 사료들이 이처럼 허술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혜종, 정종때의 왕위계승 다툼에 대한내막은 정확하게 기록될 수 없었고 왕규를 역적으로 기록한「고려사」의 역사평가에서 신빙성이 없는 자료와 정종, 광종의 역사왜곡 정책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태조가 죽자 혜종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있던 충주유씨세력과 신명순성왕후 소생들인 정종, 광종 등이 본격적인 권력팽창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왕요와 왕소는 서경 세력의 핵심 왕식렴 등과 힘을 합치고 박술희와 왕규에게만 의존하는 혜종의 태도를 못마땅해 하던 청주 유력가 김긍률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또한 견훤의 사위이자 왕요(정종)의 장인인 박영규와 박수경, 수문 형제등도 이들에 동조함에 따라 왕권은 점점 위축되어, 혜종은 침실을 옮겨 다니며 자야할 지경이었다. 왕규는 이러한 현실을 분통해 하며 혜종에게 왕요형제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역모 세력을 엄단 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혜종은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내주면서 화해의 의사를 타진한다. 비록 왕규와 박술희가 보좌를 받고 있긴 했지만 혜종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따라서 혜종은 왕요 형제와 화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혜종의 화해 손짓에도 불구하고 왕요 일파의 왕권위협은 더욱 가속화되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마침내 병을 얻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945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있어 정종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있다.
■ 제3대왕 정종 923년-949년. 재위기간 945년-949년. 집권3년.
● 개경파와 서경파의 정권다툼과 왕요의 등극
개경파를 완전히 제거하고 무력으로 왕위에 오른 정종은 즉위 초부터 개경세력과 백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때문에 그는 서경으로 천도 하기위해 많은 인력을 강제 동원하여 평양에 왕성을 쌓기시작한다. 하지만 천도계획은 오히려 민심을 이반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정종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준다. 정종은 강인하고 고집스런 성품이면서 한편으론 불심이 깊고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정종은 겉으로는 강한척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이 돌릴까봐 마음을 졸였고 또 한편으로는 즉위 과정에서 너무 많은 인명을 죽인 것에 대해 죄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즉위하자 곧 손수 불사리를 받들고 십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개국사에 봉완하기로 했고 곡식 7만석을 풀어 각 사찰에 전달하기도 했다. 죄책감이 원인이 되어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설치하여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를 양성하는 등 불교 진흥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그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했다. 948년 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말 7백필과 토산물을 바쳤는데 이때 손수 이 물건을 검열하다 갑작스럽게 몰아친 우뢰와 천둥소리에 놀라 경기가 들었다. 그로 인해 병상에 눕자 백성들은 부역에서 헤어 날수 있다 하여 좋아했고 이같은 민심을 전해들은 정종은 점차 기력을 잃었고 949년 3월 동복아우 왕소에게 왕위를 넘기고 세상을 떴다. 27세 때 정종이 죽자 서경천도 계획은 취소되었고 왕성건립도 중지되었다. 최승로는 「시무28조」와 함께 올린「5조 치덕평」을 통하여 서경 천도계획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정종은 참으로 그릇되게 믿고 왕성을 옮길 것을 결정 하였습니다.그는 천성이 강한 반면에 고집을 고치지 않았으며 백성들을 난폭하게 끌어 모아 공사를 일으켜 사람들을 고생시켰습니다. 그래서 비록 임금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옳다고 하는 일도 백성들의 마음은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원성이 일어났고, 재앙이 그림자처럼 빨리 나타나서 미쳐 서경으로 옮기지도 못한 채 영영 왕위를 떠났습니다' 문공왕후와 문성왕후는 친 자매로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의 딸이다. 태조의 제1비 동산원 부인도 박영규의 딸이다. 이같은 삼중결혼은 고려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에 해당되는데, 이것은 태조의 후백제 호족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이뤄진 일로 보인다. 이는 후백제 세력을 달래는데 박영규의 영향력이 지대 했음을 보여 준다.
■ 제4대왕 광종 925년-975년. 재위기간 949년-975년. 집권 26년. 25세 즉위.
● 광종의 강한 개혁작업과 호족들의 수난.
광종의 치세 첫 번째 시기 - 모색기 즉위7년까지.
두 번째 시기 - 왕권강화기 7년-11년.
세 번째 시기 - 호족숙청시기 11년- 집권 말 까지.
광종은 즉위 초부터 독자연호를 사용하고 951년 후주연호를 사용함 - 여진과 거란을 경계하기 위함.
● 쌍기 : 중국 후주에서 고려에 귀화한 雙哲의 아들.
956년 후주의 시대리평 재임시 사신 설문우를 따라 고려에와서 신병 때문에 체류하다 귀화, 원보 한림학사가 되었다. 958년 당나라 관리임용제도를 따라 과거제도를 창설하게 하고 수차 지공거가 되었다. 이것이 한국 과거제도의 효시이다. 후주 태조의 왕권강화 작업에 깊숙이 간여한 인물. 이러한 개혁론은 오래 전부터 왕권강화 책을 강구하고 있던 광종에겐 천군 만마를 만난 기쁨이었다. 이러한 쌍기를 고려조정으로 끌어들인 광종은 과감한 개혁작업에 착수한다.
● 광종의 개혁작업
ⓛ 노비안검법실시 :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원래 양인이었던 사람을 노비에서 해방시켜주는 일종의 노비 해방법. 호족세력 강력반발. 왕권이 강화되고 호족세력은 약세. 고려통일 전쟁 과정에서 포로로 붙잡힌 양인이거나 대호족의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로써 대호족들은 경제기반인 노비의 상당수를 상실.
②과거제도입 : 노비안검법 실시로 호족의 힘이 약화되고 왕권이 강화되자 958년 쌍기의 건의에 따라 전격적으로 과거제 실시. 960년에는 관료의 공복을 제정하여 품계별로 옷을 달리 입게 함으로써 왕과 신하의 관계를 분명히하고 관리의 상하를 쉽게 판별 할 수있도록 했다.
■ 제5대왕 경종 955년-981년. 재위기간 975년-981년. 6년.
● 경종의 화합 정책과 호족 왕족들의 재등장.
경종은 좌우집정제와 전시과를 마련하여 왕권의 안정을 다짐.
전시과 : 관료들의 인품에 따라 토지를 분급 하는 제도.
979년 발해의 유민 수만 명을 받아들였고 청새진(희천)에 성을 쌓아 변방의 안정을 모색한다. 이시기에 발해의 유민 수만명이 고려로 왔다는 것. 곧 요를 세운 거란족이 체제를 정비하고 남하하여 여진을 압박하고 동시에 고구려 유민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실시함을 의미한다. 또한 고려가 일시에 수만명의 이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안정된 상태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유배되어 있던 최지몽이 내의령에 임명되면서 고려 조정은 다시 한 번 역모의 소용돌이에 휘 말리게 된다. 혜종시절에 사천관으로 있던 최지몽은 왕규의 역모혐의를 고변한 인물로 정종과 광종의 즉위에 기여한바있다. 하지만 광종 재위시에 왕을 따라 귀법사에 갔다가 술에 만취하여 왕에게 주정을 한 죄로 외직에 나가 있다가 경종5년(980년)에 다시 등용된다. 이때 최지몽은 대광, 내의령관직과 동래군후의 봉작에 식읍 1천호를 받았다. 최지몽은 점성술이 능한데다 왕규를 제거할 때 깊숙이 관여한 바 있기 때문에 경종은 그의 예언적 능력을 정적 제거에 이용했던 것이다.
● 헌애왕후 : 997년 제7대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한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18세 였으나, 그녀는 정권욕이 강했기 때문에 섭정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천추천에 거쳐 하였으며 스스로 천추태후라고 불렀다. 그녀는 섭정기간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 아들로 하여금 목종의 대를 있게 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시 중신들은 안종과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대량원군(현종) 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고자 하였다. 당시 대량원군은 헌애왕후의 강요로 머리를 깍고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렀는데, 그녀는 그를 죽이기위해 몇 번이나 자객을 보내고 독살을 계획 하지만 실패한다.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귀양 보낼때 그녀도 황주로 내쫓긴다. 이때 강조는 목종을 죽이고 대량원군을 즉위시키는데 그가 고려 8대왕인 현종이다.
■ 제6대왕 성종 960년-997년. 재위기간 981년-997년. 집권 16년.
● 유학정치 이념의 실현자 성종과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
성종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연관회와 팔관회 등의 불교행사를 폐지하고 사회 전반에 유학열풍을 불러일으킨다. 거란은 발해를 몰락시킨 후 당연히 고구려 옛 땅을 차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이러한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침략도 불사하겠다는 엄포에 고려조정은 숙의 끝에 거란에 대한 군사적인 대응을 결정하고 거란에게 고려는 신라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이에 거란은 993년 소손령을 대장군으로 삼아 고려를 침공한다. 이에 서희는 소손령과 담판을 통해 강동6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이에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변까지 확대대고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던 여진세력은 더욱 위축된다. 고려 초에는 여자의 재가가 허락되고 이혼이 인정되지만 왕이 재가녀로 왕비를 맞아들이는 예는 찾아볼 수없었다. 때문에 성종과 문덕왕후의 결혼은 광종이후 정착된 족내혼은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종친들의 동의하에 이뤄진 일이다. 하지만 문덕왕후는 왕규에게 시집가서 이미 딸을 낳은 상태였다. 성종은 대종의 아들로써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광종의 사위로써 계승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후에 제8대 현종의 왕위 계승에서도 재현되는데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는 족내혼이 이뤄졌던 고려 왕족에서만 볼 수있는 특이한 계승법 이었다. 성종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귀족들과 제휴해서 노비안검법을 폐지한다. 노비에서 면천됐던 사람들을 다시 노비로 환천시켜 귀족들에게 돌려주기로 한다.
● 3성 6부제
3성 :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
6부제 : 이. 병. 호. 형. 예. 공부(순서별)
12목 설치 : 12목을 설치하여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12지역에 주목(州牧)을 파견하여 호족세력을 억제하고 중앙의 명령을 지방까지 효과적으로 하달하기 위한 행정체제. (양주, 광주, 청주, 공주, 해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황주)995년 전국을 10개 지역으로 나누는 10도제를 실시함.
● 서희와 강동6주
소손령의 요구사항 ⓛ 고구려의 옛 땅은 거란에 속한 것이니 내놓으라는 것.
② 국경을 마주하고있는 요 나라(거란)를 섬기지 않고 왜 바다건너 송나라를 섬기느냐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함.
이에 서희는 고려는 국호로 이미 고구려를 승계하고 있었으며 또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국도로 정하고 있음을 내세우면서 고구려 옛 땅이 거란의 영토라는 주장에 반격하고 거란과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지 못한 것에 대하여 거란과 고려사이에 여진이 있기 때문에 거란을 왕래하기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려운 탓이라고 해명하고 거란과 고려가 통교하기 위해서는 외교를 방해하는 여진을 쳐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여진이 머무르는 곳에 성을 구축하고 길을 통할 수있도록 거란이 도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거란은 송과 대립중이였고.. 고려는 중간에 있었습니다. 거란은 송과 고려과 연합하여 공격할까봐 고려와 관계를 맺기 위해 고려를 침입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서희는 당시의 국제관계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신으로 외교 담판에 나섯 것입니다. 당시 거란은 유목민족이기 때문에 평지 싸움에 익숙하였지만 고려를 침범해오면서 흔한길이 아닌 산악지형을 넘어왔고, 또한 거란의 전술은 속도전입니다. 거란은 수도만 장악하면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려는 거란이 현지에서 식량을 얻지 못하게 청야전을 썼으며, 거란은 퇴로를 생각하지 못하고 고려 깊숙히 침투하여 잘못하면 포위당할 수 있는 위기에 처합니다. 12월이 되어 날씨는 추워지고 식량은 없으니. 소손녕은 서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거란은 고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본토에 송이 쳐들어올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란은 강동6주를 준 뒤에도. 낙타와 말 양 비단을 선물했습니다. 거란과 송은 고려가 경계 대상인 동시에 가까이 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거란과 고려가 외교를 맺어 송과 단교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민간교류는 활발하였습니다. 송은 무역만이 고려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라 생각하여 적자를 보면서도 고려와의 관계를 끊지 못하였습니다. 즉 서희는 당시 국제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힘을 쓴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려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의를 챙긴것이지요~
● 최승로의 시무28조 -[崔承老, 927~989] 역대 왕들에 대한 평가를 하고 성종에게 올린 상소문.
본관 경주. 시호 문정. 12세 때 왕 앞에서 논어를 암송하여 칭찬을 듣고, 안마와 예식 20석을 하사 받았으며, 원봉성 학생이 되는 은혜를 입었다. 학문연구에 전심, 일찍 문병을 관장하고 982년 왕명에 따라 사회개혁 및 대중국관의 시정 등에 관한 시무책 28조를 올려 군제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등 전반적인 면에 걸쳐 폐단을 시정, 새로운 제도를 제정 ·건의하여 고려왕조의 기초작업에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토호들의 횡포로 인한 세공 수납의 폐해를 시정토록 12목을 설치, 목사를 상주시켜 중앙집권적 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988년 문하수시중 에 승진하고 청하후에 봉해졌다.
■ 제7대왕 목종 980년-1009년. 재위기간 997년-1009년. 11년 18세에 즉위함.
●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18세의 어린 목종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가 차지하게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경종비) 김치양과 부부의 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척촉과 권신들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목종은 경종이 사망할 당시 두 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송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 개령군에 봉했다.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거머쥔 헌애왕후는 자신의 정부인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대에는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고 귀양 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도록 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므르고 김치양과 부부행세를 하며 아들까지 출산한다(1004년). 김치양은 우복야겸 삼사사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명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되자 벼슬을 원하는 자들로 그의 집은 문전성시를 이뤘고 뇌물이 엄청 들어왔다. 목종은 이런 김치양을 내쫒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헌애왕후로 인해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게 되자 목종은 동성애를 하고 그 대상은 유행간이며 유행간은 합문사인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 묻지 않은 것이 없었고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왕을 조정하여 이룰 수있었다. 유행간은 또 유충정이라는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 줬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현종) 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인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 되었다. 이 아이가 바 로 대량원군(현종)이다. 1009년 목종이 병으로 눕자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고 그들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없었다.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목종은 임종이 가까워지자 한시바삐 후계자를 결정코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 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그를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 도순검사인 강조를 불러들였다. 조가 왕명을 받고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최창이 찿아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헌애왕후는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배치해둔 상태였다. 그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급히 사람을 시켜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에 강조는 병력 5천을 인솔하고 평주에 도착해서야 왕이 살아 있다는것을 알았다. 이에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 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고 부하 장수들의 건의에 따라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우고 김치양부자와 유행간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과 헌애왕후의 친족 이주정등 30명을 귀양 보냈다. 목종은 강조가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강조의 부하들이 목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이때 목종의 나이는 30세였다. 이같은 강조의 역모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는 빌미가 되었다.
■ 제8대왕 현종 실록 992년-1031년. 재위기간 1009년-1031년 22년 18세 즉위.
● 수난을 먹고 자라난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신장.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현종) 뿐이었다.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 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서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의해 대궐에서 양육 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다. 헌애왕후가 대량원군 왕순을 죽이기위해 자객을 보내고 독이든 술과 음식을 먹이도록 강요하기도하였다. 그 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그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곧잘 중간에서 사라 지곤 하였다. 하지만 대량원군 왕순을 차기 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했던 유충정이 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히 위기 상황을 전할수가 있었다. 목종은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부사로 있는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 주며 한시바삐 신혈사로 가서 왕순을 대궐로 데려 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강조는 왕의 명령이 헌애왕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기위해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서경을 떠날 때 강조는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하여 왕이 살해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도 평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와 반역으로 몰릴 것이 뻔한 처지에서 선택의 길은 한가지 뿐인 궁궐로 향해 말을 달렸다. 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했다.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그는 거부했다.
● 거란의1차침입 - 993년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서희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소손녕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든지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고, 후자가 유력했으나 서희·이지백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흥화진·통주. 구주·곽주·용주·철주 등을 획득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요의 제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받아 침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북진정책의 일환으로서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에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요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 거란의2차침입 - 1010년.
동여진의 고변으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거란은 1010년 7월 급사중량병과대장군 나률윤을 파견하여 목종 살해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 하였다. 이에 따라 진적과 윤여를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 폐립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거란 왕은 40 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진군하였다. 거란은 항복을 종용 하면서 목종을 죽인 강조를 거란에 압송하면 회군 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거란군과 고려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고려는 반격을 개시했지만 역부족으로 한 달만에 서경을 내주고 거듭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거란은 개경까지 밀어닥쳐 궁궐을 소각하고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 이때 현종은 경기도 광주에 머물러 있다가 거란이 남하해 옴에 따라, 장곡과 태인을 거쳐 노령산맥을 넘은 다음 나주로 몸을 피신했다. 거란이 퇴각하자 현종은 전주 공주를 거쳐 2월 중순경 개경으로 돌아왔다.
※ 태조왕건은 후대 왕들이 경계해야할 10가지를 남겼는데 훈요십조 중 제8조 차령산맥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지세가 다같이 배역인 심의 땅이므로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대 학자들은 이것이 경주 최씨 세력들에 의해서 조작됐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들이다. 일찌기『고려사』태조편이 편찬되었지만 현종 시대 거란의 2차 침입(1010년-1011년)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 이라는 인물이 (최승로의 손자) 최항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와서 왕건의 유서라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 『고려사』열전 편. 최항은 경주 황룡사의 중창을 주장하고 이를 수행한 인물로써 신라의 후예였다. 최제안은 고려초기 중신이었던 최승로의(성종때 시무28조) 손자이며 최승로는 경주출신으로 신라에서 고위벼슬을 지낸 최은함의 아들이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구신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에 보관되어 있었겠는가? 호남세력은 왕건이 죽은 뒤 정종, 광종대를 거치면서 황주의 황보씨집안과 충주유씨집안, 경주세력등의 따돌림을 받아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종이 거란에 쫓겨 나주로 피신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신라계 인물들은 주로 문반 이었으므로 쫓기는 현종을 보살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란이 강조를 죽이고 물러난 뒤 현종이 개경에 돌아오기까지 두 달 동안 호남사람들의 접대는 어린 나이의 현종 에게는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주에서 박온의 딸을 얻고 훈요십조에서 배역의 땅으로 지목한 공주 강 나루터에서 김은부는 세 딸을 현종과 동침시켜 개경에 남아있던 경주계 권신 최항 등을 당황스럽게했다. 김은부의 맏딸인 원성왕후가 제9대 덕종과 제10대 정종을 얻고 둘째 딸인 원혜왕후 김씨가 11대왕인 문종을 낳는다. 최항은 채충순과 모의해서 김치양을 역적으로 몰고 목종까지도 몰아내는 등 경주 김억렴의 외증손인 현종을 왕위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다. 최항과 같은 집안인 최제안은 현종을 만나 태조께서 후대 왕들이 명심할 「훈요십조」를 남긴 바 있는데 그 「훈요십조」가 최항의 집에 있어 가져 왔다고 내비친 바 있다. 이 경위는 현종때 편찬한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최항이 거란의 침입을 겪은3년 뒤 새로 짖는 국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 넣었다는 데서 의심이 간다. 최항 등은 강조가 거란의 성종에 의해 살해된 뒤 현종이 돌아오자 강조와 더불어 현종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운 전남출신 위종정, 박승종, 탁사정 등을 해도로 유배시켜버렸다. 그리고 경주출신 최치원과 설총을 문묘에 배향하고 경주를 동경으로 승격시켰으며 「훈요십조」의 권위를 보완할 목적으로 도선을 대선사로 추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학계일각에서「고려사」가 편찬된 시기와 배경을 두고 위작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다. 일본인 사학자 금서룡은 위작의 주동인물로 최항과 최제안을 꼽고 있다.
● 거란의3차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 10만이 다시 침략을 강행하는데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주력부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퇴각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고려군에 의해 구주에서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벌어진 이 전투가 그 유명한 귀주 대첩이다. 현종대의 국력강화에 힘입어 고려는 13세기까지 거란, 여진 등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속 할 수있었다. 이제현은「고려사」에서 현종의 치 새를 이렇게 평가하고있다. "군자는 나라를 잘 다스릴 때에도 환란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하며 편안한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천도를 받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현종 에게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구나 라고 기록됐다" 중국에서는 송과 거란이 세력팽창을 위해 계속해서 서로를 공격함. 송나라에서는 화약과 나침판이 발명됨.
■ 제9대왕 덕종 1016년-1034년. 재위기간 1031-1034년. 3년. 16세-19세.
● 덕종의 짦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德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덕종은 나이답지 않는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평민한 정치를 펼쳐 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7왕위에 오른지 3년 여만에 생을 마감한다. 덕종은 현종과 마찬가지로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권다툼으로 밀려난 거란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정국을 진단하고 내부사정을 분석하기도 했다. 현종대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외침 속에서 국력을 한층 신장시킨 고려는 덕종대에는 군사적으로 강성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이후 꾸준히 성장한 과거출신 신진관료들이 바로 이러한 정치의 안정적 기반이었다.
■ 제10대 정종 1018년-1046년. 재위기간 1034년-1046년. 11년. 17세-28세.
● 정종의 실리정책과 고려의 안정
정종 대에는 거란과 화의모색으로 거란의 연호를 사용한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대치관계는 일단락 되고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하는 13세기까지 양국간의 평화는 지속된다. 1044년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이같은 국력의 증대는 고려사회를 외침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내부 기강확립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1039년에는 奴婢從母法 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 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은 변방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회의 안정책을 실시한다. 정종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는다. 선대 왕들과는 달리 모두 혈연관계가 없는 족외혼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정종의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입김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작용 했다는 의미이다.
■ 제11대 문종 1019년-1083년. 재위기간 1046년 1083년 37년간. 28세-65세.
● 성군 문종과 고려의 태평성대
정종시대에 마련된 안정을 기반으로 문종은 정치.사회.문화.외교.학문등 모든 분야에 걸쳐 획기적인 발전을 일궈 낸다. 37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지속된 이러한 발전은"고려의 황금기"를 열게 되고 이에 따라 고려문화의 대외적위상은 한층 격상된다. 최제안의 후임으로 최충을 시중에 앉히면서 본격화되어 왕총지 이자연등의 재상들을 거치면서 한층 무르익는다. 1071년 문종은 신하들의 강력한 만류를 저지하고 민관시량 김제를 송에 파견함으로써 고려와 송은 다시금 정상적인 국교관계를 맺었다. 송은 당시 고려와 힘을 합해 거란을 압박하고 과거의 영토를 회복 하고자 하였고 고려는 송을 통해 거란을 견제하는 한편 그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거란과 외교관계를 끊지 않음으로써 고려는 북방의 안정을 유지 시켰다. 문종 대에는 정치와 외교의 안정과 더불어 학문적으로도 대단한 발전이 있었다. 학문을 주도한 인물은 최충이었다. 그는 일흔이 되자 스스로 퇴직을 신청한 후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문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력을 동원하여 흥왕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절은 1055년 에 공사가 시작되어 약 13년만에 완성되었으며 총 2천8백 칸의 규모로 대궐의 크기와 비슷했다고 한다. 금144근 은427근을 들여 금탑을 조성하기도하고 절 주변에 성을 쌓아 재난시에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도록 했다. 계행이 청정한 1천명의 승려가 머물렀던 흥왕사는 문종대 이후 고려불교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숙종 대에는 흥왕사 금탑에 송나라에서 보내 온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공식적으로 부활시키고 많은 불교행사를 치렀다. 또한 스스로 청정한 생활을 하며 매월 세 번 이상 꼭 절을 찾아 기도를 하면서 백성들의 불심을 자극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켰는데 그중 하나인 대각국사 의천에 의하여 천태종이 도입되어 대대적인 불교 운동이 일어난다. 이는 당시 대신들은 대개 유학에 몰두하였는데 대게 유학에 몰두하였는데 유학의 지나친 부흥으로 대신들의 힘이 강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민심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불교를 융성시키는 것보다 좋은 방책은 없었다. 문종은 철저한 법치주의를 주장하며 법제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곧잘 예외를 인정하고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는 포용력이 있는 왕이기도 했다. 대신들의 논리가 옳다고 판단될 때는 과감하게 자신의 고집을 꺾는 군자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무서운 추진력을 보이기도 했는데 불교융성책과 흥왕사 창건 그리고 송나라와의 국교 정상화 등의 문제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러한 문종의 정치적 넓이와 인격은 고려사회를 건국이래 최고의 황금기로 끌어 올렸다. 문종은 이자연의 세 딸을 맏이 하였으며, 그중 인예왕후 이씨에게서 10남2녀를 낳았으며 12대순종,13대선종,15대숙종, 대각국사 의천등이 있다. 인경현비 이씨가 3남을 낳았으며 총13남 2녀를 얻었다.
● 대각국사 의천 - 천태종의 창사자 (1055년-1101년)
그는 총명하고 지혜가 뛰어나 짧은 시간에 화엄경을 통달하였고 학문을 좋아해 홀로 유학에 쉼취하여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송나라에 유학을 결심하나 문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문종 사망 후인 1085년 4월 그는 모후에게 한 장의 편지만을 남긴 채 유학길 에 오른다. 송 황제 철종은 그를 환대하고 계승사에 머물도록 하는 한편 화엄의대가 유성법사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원법사를 만난 의천은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기신론 등의 사상에 대하여 논하고 천태사상과 현수의교학에 대해서도 배우게 된다. 의천과 중국학자들의 토론이 지속되는 가운데 의천의 귀국을 청하는 선종의 국서가 송나라로 날아들었고 모후 인예왕후의 간절한 염원으로 의천은 유학 1년만에 불경 3천여권을 싣고 귀국한다. 그 후 그는 흥왕사의 주지가 되어 천태학을 정리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흥왕사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이들 경서를 간행했다.「의천목록」4740권의 책이 간행되는데 이를「고려속장경」 이라 한다. 경전 간행작업을 마친 의천은 숙종 2월에 국청사가 완성되자 그 곳 주지가 되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천태교학을 강의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이 무려 천명이 넘었다. 의천은 이를 바탕으로 1099년 천태종을 개창하게 되고 이로써 천태종은 명실공히 하나의 공증된 종파로 자리하게 된다. 원래 화엄경에 몸담았던 의천이 천태종으로 개창한 것은 천태사상의 핵심인 회삼귀일 일심삼관의 교의가 선종과 교종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선종이 도입된 신라이후 선종, 교종은 서로 대립적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의천이 볼 때 이는 국가의 기반을 뒤흔들 수있는 요소로 비춰졌다. 따라서 의천은 천태 사상으로 선종, 교종의 화합을 이뤄 국론을 통일 시키고자 했다. 의천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많은 타 종단 승려들이 천태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결과 천태종은 고려 사회에서 가장 조직력이 뛰어난 종단으로 성장한다.
● 문종시대를 이끈 양대산맥
● 동방의 귀공자 최충(984년-1068년).- 해주 최씨.
22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우습유에 올랐으며 1013년 에 황주량등과 「칠대실록」편찬 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 하였다. 그 후 한림학사,예부시랑,간의대부,형부상서등을 역임하고 문종즉위 후에는 평장사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됨. 죄수에 대한 심문을 할 때에는 반드시 형관 3인이 함께 들어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이 마련되었다. 일흔이 넘자 스스로 청치일선에서 물러 난 최충은 육영사업에 몰두해 총9개의 서재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다. 「구재학당」설립으로 많은 제자를 길러 내자 고급관료 출신 학자들이 대거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 했다. 그 결과 개경에 12학당이 생기는데 그것을 일러 사학십이도라 하였다. 사학십이도 중 으뜸은 최충의 문헌공 학도였다. 최충의 시호를 따라 붙여진 이학도의 수는 수백명에 이르렀고 이들 주도하에 개경 뿐아니라 지방에까지 대대적인 유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학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최충의 흔적이 흡사 중국의 공자에 비견된다 하여 "해동공자"라는 별칭이 붙는다.
● 문종의 오른팔 이자연(1003년 1061년) - 경원이씨(인천,인주)
1003년에 태어난 그는 당시 권문세가였던 현종의 장인 김은부의 처조카였기에 이미 막강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1024년 3월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며 1031년 우보궐이 되었다. 이부낭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거쳐 지중추원사, 중추부사등을 지내다가 1050년 평장사에 올라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한다. 내사사랑평장사에 오른 그는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그리고 세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조정의 실세가 된다. 그의 큰딸이 1052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 되면서 그는 문화시랑평장사를 거쳐 1055년에는 최충의 뒤를 이어 재상직인 시중에 오른다.
■ 제12대 순종 1047년-1083년. 재위기간 1083년. 3개월
● 순종의 병상 3개월 치세
순종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7년에 태어났으며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 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12대 왕에 올랐다. 그는 원래 병약한 몸인데 문종이 죽자 그 슬픔과 상중의 피로함을 이기지 못하고 육신이 더욱 약해졌다. 그 바람에 재위 3개월만에 임종을 앞두는 신세가 됨으로써 고려 34대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 되었다.
■ 제13대 선종 1049년-1094년. 재위기간 1083년-1094년. 10년
●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
순종이 즉위 3개월만에 생을 마감하자 친동생인 선종이 왕위를 이었다. 선종은 문종의 둘재 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봉해졌으며 상서령에 제수된 뒤 순종 때 수태사중서령이 되었다. 순종1년(1894)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순종2년(1085) 동생인 의천이 몰래 송에 건너가 불법을 공부하고 2년 후에 돌아왔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였다. 1094년 2월 열병하고 5월에 연녕전에서 죽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손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을 많이 세워 백성들의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원망이 많았다 한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이며, 시호는 사효 이다.
● 근친혼의 금지
선종2년(1085)에는 이복남매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은 벼슬에 오르는 것을 금하였다. 근친혼이 규제 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가 건국 된지 160여 년이 지난 문종때부터였다. 1058년(1058)에는 대공친인 사촌끼리 결혼하면 그 자식이 관리가 될 수 없게 하였다. 선종2년의 이러한 조치는 바로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금지조치가 취해진 이유는 고려사회에서 유학이 통치 이념으로 정착되면서, 중국에서 동성근친간의 결혼을 철저히 금지하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문종이후에는 왕실에서도 남매간의 결혼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국가는 이러한 금지 규정을 실천하는데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랜 근친혼 풍습으로 인해 고려에서는 중국처럼 동성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철저 하게 시행할 수 없었다. 중국과 달리 고려에서는 결혼당사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는 등 간접적 처벌을 하였던 것이다.
● 거란의 각장 설치문제
목종8년(1005) 국경무역의 장소인 인무군(振武軍)과 보주(保州)에 각장(?場)이 개설됨으로써 양국간의 경제적인 접촉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았다. 그러나 강동6주에 대한 거란의 환부강요는 고려의 반감을 자아내어 각장무역의 폐지를 야기시켰다. 하지만 유목생활을 하는 거란족은 고려의 물자가 필요하였고 각장무역에서 얻는 이익에 관심이 높은 거란은 송에 대해 각장설치의 확대를 요구하였고, 고려에는 각장설치의 재개를 요구해왔다. 요의 도종은 각장이 폐지된 지 거의 80년이나 경과한 선종3년(1086)에 압록강변에 각장 개설을 제의해왔다. 고려는 이에 반대하였다. 거듭된 고려의 각장 철회 요구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는 중추원부사 이안(李顔)을 귀주로 보내 국경의 정황을 살피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였다. 그 해 9월 다시 거란에 사신을 파견해 각장 철회를 요구하자, 결국 거란은 승복하고 말았다. 고려의 압록강 경계에 대한 끈질긴 감시와 요구로 거란은 어떠한 시설물도 설치할 수 없었으며 이로써 양국 사이에는 고려의 의도대로 거란 멸망 때까지 각장이 개설되지 않았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간의 각장설치는 목종8년(1005)부터 2차 침입이 시작된 현종 원년까지 약 5년간 존속된 것으로 이해된다. 거란의 각장 포기는 고려의 거란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 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거란에 대해서는 강경자세로 송과는 가까이 함으로써 고려가 문화를 존중하는 국가임을 과시하고 일본과 여진 등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유화책을 고루 실시하여 어느 한쪽에 편중되는 일이 없었다.
■ 제14대 헌종 1084년 1097년. 재위기간 1094년-1095년. 1년.
● 나이 어린 헌종의 즉위와 왕위를 노리는 사람들
헌종은 선종과 사숙왕후의 소생으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11세의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 명으로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선종이 자신의 병약한 아들에게 선위해 버린 것이다. 짐이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왕위에 올랐더니 나이가 어리고 몸이 허약한 관계로 나라의 권신들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인민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전략가들에게 겉잡을 수없게 일어나며 역적 난신들이 대권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니 너희 대중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나는 후궁으로 물러 앉아 남은 여생이나 유지 하겠다. 즉위 초에도 이미 헌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백관 등 역시 그를 왕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후궁으로 물러앉은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 마감한다. 병명은 소갈증 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 이었을 것이다.
■ 제15대 숙종 1054년-1105년. 재위기간 1095년-1105년. 10년.
●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즉위한 숙종의 10년 통치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질이 강하여 매사에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경자사 등 많은 서적을 읽어 학문에 밝았고 이 때문에 문종의 총애가 남달랐다. 문종은 어린 그에게 "후일에 왕실을 부흥시킬 사람은 아마도 네가 될 것 같구나" 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아꼈으며 1065년 그를 계림군에 책봉했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경 상서령에 올랐고 이듬해 소태보와 왕국모의 도움으로 외척 이자의 세력을 몰아낸 다음에는 중서령에 올라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해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써 고려 제15대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는 42세임.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르던 날에도 친인척을 귀양 보냈다. 숙종은 이처럼 처음부터 매우 강한 인상을 풍기며 측근세력을 중심으로 강력한 왕권을 형성 하고자 하였다. 정치, 외교는 전번기에는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여진족의 국력강화에 따라 불안이 가중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대의 정치는 전체적으로 안정궤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덕택으로 주목할 만한 문화적 성과를 남긴다.1096년에는 6촌이내의 혼인을 금지하게 되는데 이는 유학자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 왕실은 광종이후 지속적으로 성골왕족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6촌이내의 족내혼이 성행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유학을 숭상하던 유림들은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리를 중시해서 숙종대의 6촌 이내의 결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림들의 힘이 강성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족외혼을 권장하던 송나라의 입김도 한껏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뿐만 아니라 왕실에서도 별로 지켜지지 않았다. 유학의 진흥책과 함께 원효와 의상을 국사로 추정하고 그들의 공덕을 새겨 동방의 성인으로 높임으로써 불교의 진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문화적 업적 이외에 군사적으로는 기마병 중심의 여진에 대항하기위해 별무반을 조직하게 된다. 윤관의 주장으로 설치된 별무반은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과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 승병으로 구성된 항마군이있었으며 고려는 이를 별무반을 통하여 여진정벌을 추진한다. 숙종 대에는 이와 같이 정치, 외교적으로 전환기에 놓였기 때문에 한편으론 안정되고 또 한편으론 불안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숙종은 이런 정세 속에서 왕권을 강화시키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 하다가 1105년 고구려 동명왕의 묘역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결국 환궁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들어오는 노상의 수레 안에서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해동통보 - 1102년 제조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 1만5천관 을 주조하여 양반과 군인들에게 분배.
송나라와 거란(契丹)이 전폐(錢幣)를 사용한 것을 참고하여 1102년 12월 1만 5000관(貫)을 만들어 재상(宰相) · 문무양반(文武兩班) · 군인에게 나누어 주고 유통을 장려하기 위해 개경(開京) 좌우에 술집을 두며, 거리에는 점포를 열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해동통보 외에 삼한통보(三韓通寶) ·동국통보(東國通寶) ·해동중보(海東重寶) 등의 동전도 함께 사용하였다.
■ 제16대 예종 1079년-1122년. 재위기간 1105년-1122년. 16년. 17세 즉위.
● 예종의 영토확장 노력과 여진의 성장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되고 거란의 힘이 약화되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거란에게 내주었던 압록강 변의 두성을 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영토확장 계획은 2년뒤 출병을 통하여 구체화된다. 1107년 10월 고려조정은 여진 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국경경비군관의 보고에 따라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17만 대군으로 여진정벌을 단행한다. 그 해 12월 여진과 싸워 웅주, 영주, 복주, 길주 등을 장악하고 그 곳에 성을 쌓았으며 이듬해 초에 항주와 공험진에 성을 쌓고 또다시 3월에 의주, 동태진, 평윤진 등에도 세성을 쌓아 백성들을 이주 시킴으로써 고려는 동북지역에 9성을 얻게 된다. 여진은 이 9성을 회복하기위해 매일 같이 싸움을 걸어왔다. 여진은 북계의 9성을 돌려주면 고려에 곡물을 바치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는 변방을 넘보지 않겠다고 했다. 고려조정은 찬반토론 끝에 조정의 대세에 따라 9성이 반환되자 여진은 고려에게 대대손손 공물을 바치고 국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1109년 7월 철수작업에 돌입했다. 고려조정은 역모사건으로 왕규를 비롯하여 수십명이 귀양길에 오르고 그중 일부는 참형을 당하였다. 고려가 이렇게 내부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중국 대륙에서는 여진족이 꾸준히 성장하여 1115년 금을 건국하였고 추장 아골타는 황제를 자청하면서 고려 에 대해 형제지국을 맺을 것을 요구해온다. 하지만 고려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진의 팽창에 따라 거란은 고전을 면치 못하자 고려에 원병을 요청해왔고 고려는 사태의 추이를 살피며 거란의 원병요청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 있었다. 거란의 야율녕은 고려에 쌀을 원조해 줄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고려는 내원성과 포주성을 포기하면 굳이 쌀을 원조받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며 두성을 고려에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리하여 고려는 1117년2월 거란에 빼앗겼던 내원성과 포주성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서쪽으로 밀려난 거란은 고려에 공문을 보내 함께 여진을 칠 것을 강권하지만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1117년엔 송나라에서 대성악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궁중 음악인 아악의 시초다. 급변하는 격동기 속에서 예종은 이렇듯 밖으로는 중립외교를 통하여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하고 안으로는 요순정치를 구현하며 태평성대를 꿈꾸는 왕이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가 시인임을 자처하며 어려서는 선비들과 시를 지어 화답하고 송나라의 선진적인 문화를 숭상하며 유학의 발전에 주력했으며 동시에 토속신앙과 불교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고려문화의 질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예종의 정치에 대해 실록을 편찬한 한 사관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예종은 영토를 넓히는데 뜻을 두고 변방에서의 전공을 요행수로 기대하여 적과의 혼극이 계속 되었으며, 송나라 문화를 흠모하여 호종단(송나라 사람으로 고려에 와서 벼슬을 한 사람)을 신임하여 자못 그의 말에 미혹됨으로써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 예종과 순덕왕후이씨(이자겸의 둘째 딸) 와 사이에 인종이 태어남.
● 윤관의 여진정벌과 동북 9성. (? - 1111년). 파평윤씨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분산되었던 여진은 11세기 후반에 이르러 통일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숙종 때 북만주 완옌부의 추장 영가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북간도 지방으로 세력을 뻗쳐 왔고, 뒤를 이은 우야소는 다시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게 되자, 정주를 경계로 고려군과 충돌하였다.이에 고려에서는 임간을 시켜 여진을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였고, 뒤를 이은 윤관의 북벌군도 여진의 기병에 패하여 철수하였다. 기병 중심의 여진군을 보병 중심의 고려군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이를 계기로 고려는 윤관의 주도로 별무반을 창설하였다. 별무반은 기병 부대인 신기군, 보병 부대인 신보군, 승병 부대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신기군은 문무 산관(散官)과 서리로부터 상인, 노복에 이르기까지 말을 가진 자로 편성하였고, 말을 가지지 않은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은 신보군에 편속시켰다. 여진 토벌은 예종 때에 이르러 단행되었다. 예종 2년 12월에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하는 17 만의 출정군은 천리 장성을 넘어 여진족의 거점인 함흥 평야와 그 이북 지방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였다.고려는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이 곳을 개척하여 살게 하고 9성을 수축하였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에 이주민 1,948가구, 영주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238가구, 웅주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436가구, 복주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 가구, 공험진에 이주민 532가구로서,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 통태, 진양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동북 9성의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를 두어 이 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그러나 거처를 잃은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략으로 인 한 방비의 곤란, 서북쪽 거란에 대한 경계의 필요성 및 여진의 환부 애원으로 고려는 9성을 1년 7개월 만에 다 시 여진족에게 되돌려 주었다.
동북9성 - 1107년 함주, 영주, 웅주, 길주, 복주, 공험진, 진양진, 통태진, 숭령진에 성을 쌓는다. 그 위치와 지역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이곳이 여진족의 중요한 생활 터전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진이 금나라를 세우기전 이곳에 살던 여진인 들은 고려에 조공을 바쳤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여진정벌을 위한 임시적인 군사조직인 별무반을 조직한다. 기마병을 보완하고 항마군을 신설하는 별무반. 윤관은 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보궐을 지냈고, 숙종 대에 누차에 걸쳐 승진하여 한림학사 승지에 임명되고 예종즉위 후에 정2품 평장사로 지내며 여진정벌을 준비하여 상장군으로 활약했으며 종전 후에는 문하시중에 올랐다가 1111년 생을 마감한다.
■ 제17대 인종 1109년-1146년. 재위기간 1122년-1146년 23년 14세 -37세.
● 인종의 우유부단한 정치와 고려왕조의 위기
예종이 죽고 14세의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 조정은 권력암투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한다. 이 때문에 인종은 장인이자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한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고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중심이 된 개경세력 사이에 끼어 수동적인 정치로 일관한다.
● 이자겸의 난과 고려조정의 혼란 - 1126년
인종이 왕위에 오를 무렵 조정은 이자겸을 중심으로 한 외척세력과 한안인을 중심으로 한 관료세력이 서로 정권을 다투고 있었다. 예종대에 이들은 왕의 중립정책으로 말미암아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어린 인종이 즉위하자 이자겸이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다. 관료세력인 한안인파를 제거하고 절대권력을 얻은 이자겸은 자신의 셋째 딸과 넷째 딸까지 왕비로 삼게 한다. 또한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문하시랑 평장사 척준경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다. 이자겸에게 왕권을 완전히 장악당한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이자겸과 척준경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인종의 이자겸 제거 계획 명령을 받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은 최탁, 오탁, 권수 등의 무장들과 의론하여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와 척준경의 아우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내시 척순을 죽이고 시체를 궁성 밖으로 내던졌다. 이에 척준경은 군사 수십명을 이끌고 궁성을 포위 하였고 척춘경측과 왕의 호위군사이에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궁성세력은 수 부족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고 인종은 근신 십여명과 함께 궁궐을 버리고 산호정으로 피신하였다. 패색이 짙어지자 인종은 이자겸에게 왕위를 넘겨줄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조신들의 극렬한 반대를 의식한 이자겸이 선위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못했고 그 때 이자겸의 재종형 이수가 선위를 강하게 반대하여 인종은 가까스로 왕위를 넘겨주는 사태는 모면하였다. 왕권회복을 위해 나섰던 군신들은 살해되거나 모두 유배되었고, 또한 인종은 이자겸에 의해서 사저에 연금 되었으며 정사의 결제권을 빼앗기고 음식을 통제 당하고 행동을 제약받는 지경에 처했다. 한편 인종은 왕권을 회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이자겸과 척준경을 이간 시키기로 마음먹고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려 이자겸을 척결하도록 명령한다. 인종이 척준경과 힘을 합치려 하자, 이자겸은 이를 감지하고 인종을 독살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셋째 딸인 왕비의 방해로 실패하고 다시 자객을 시켜 왕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척준경은 왕이 위험하다는 전언을 받고 군사를 동원하여 이자겸과 그 일파를 제거한다. 또한 왕비로 있던 두 딸도 폐출됨으써 이자겸의 난은 종결된다. 조신들은 이자겸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인종은 그가 자신의 장인임을 상기시켜 유배시키는데 그쳤다. 그리고 이자겸을 제거한 공로로 척준경에게 공신칭호를 내리고 중서문하평장사에 임명한다. 이자겸을 제거한 척준경은 1127년 3월 "이자겸을 제거한 일은 일시의 공이나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의 죄 라는" 정지상 의 탄핵이 있자 암타도로 유배되었다가 곡주로 이배 되어 등창으로 죽었다. 한편 1125년 거란의 요가 여진의 금에게 멸망당해 서쪽으로 쫓겨나고 송나라 역시 1127년 금에게 쫓겨 남으로 밀려난다. 이렇게 되자 중국 대륙의 패권은 금에게 넘어 갔으며 고려 역시 금의 위협을 받게 된다.
● 이자겸과 굴비의 유래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은 십팔 자(十八子), 즉 이(李)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참위설을 믿고 난을 일으키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난은 미수에 그치고 이자겸은 붙들리어 지금의 전남 영광군에 있는 법성포라는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이자겸은 그 기가막힌 맛에 반해 임금께 바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곧 조기를 소금에 절여서 법성포 앞바다의 바람으로 잘 말려 임금께 바쳤다. 그런데 그는 이때 자신의 이 같은 행위가 자신의 죄를 감면받기 위한 아부행위가 아니라 단지 백성 된 도리로서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음식을 '굴비(屈非)'즉 비겁하게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름지어 바쳤다고 한다.
● 묘청의 난과 서경세력의 몰락 1135년.
인종은 이자겸의 난이 종결된 후부터 줄곧 왕권 강화에 매진했으며 그 일환으로 서경천도 계획을 세운다. 묘청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개경이 이미 업운이 쇠진하여 궁궐이 다 탄것이라며 왕기가 서려 있는 서경으로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세력은 서경천도론이 현실화 될 경우 자신들이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정치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묘청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린다. 묘청은 성인이며 그의 제자 백수한도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국가의 대사를 소상히 자문한 후에 정사를 처리 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태평성대를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며 대신들에게 문건을 돌려 중신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에 인종은 묘청에게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왕실의 위엄을 살리고 태평성대를 개창할 방도가 없는지 문의하였다. 그러자 묘청은 국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위치를 설정해 주었다. 궁궐을 신축 하기위해 엄동설한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1132년 왕궁이 수축하자 인종은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인종은 몰고 가던 말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 버리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그 날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고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간언하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렸다. 태화궁 건설 후 잇따라 계속된 재화 때문에 묘청의 입지는 많이 약화 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묘청을 위시한 서경세력은 극약처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정하고 인종에게 서경으로 행차할 것을 건의 하였다. 하지만 인종이 간관들의 반대에 부딪쳐 서경행차를 거부하자, 1135년 정월 그들은 군사를 일으켜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김부식을 비롯한 개경세력들은 토벌군을 출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인종은 별수없이 출병을 명령했다. 그러자 김부식은 우선개경에 머무르고 있던 서경파 인물들인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을 처단한 후 대병력을 이끌고 서경으로 향했다. 전세의 불리함을 절감한 반란군 조광은 항복을 결심하고 묘청, 유담, 유호 등의 목을 베어 분사대부경 윤첨을 시켜 개경으로 보냈다. 그런데 개경에 도착한 윤첨이 옥에 갇히자 조광은 항복을해도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결사 항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일여년 만에 서경성은 함락되고 묘청의 난은 완전히 종결됐다. 묘청의 난이 제압되자 조정내의 서경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으며 불교세력도 상당히 쇠퇴 하였다. 반대로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 문신 귀족들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자 서경 세력과 개경 문신귀족 세력의 균형이 깨어져 문신귀족이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후에 이것은 곧 왕을 능멸하고 무신을 홀대하는 풍조로 이어져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 김부식과 삼국사기 - 1145년. 경주 김씨 (1075년 - 1151년)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은 삼군원수로 임명되어 반란군을 토벌하였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문하시중에 올랐다. 김부식은 경주출신으로 신라왕족의 후예이다. 신라가 망할 무렵 그의 증조부 김위영은 왕건에 귀의하여 경주지방을 관장하는 수장이 된다. 그 후 고려가 통일 된 뒤에도 경주의 호족으로 남아있다가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에 이르러 중앙정부로 진출하게 된다. 김부식의 네 형제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매년 임금이 그들의 어머니에게 곡식을 내렸다. 맏이 부필을 제외한 부일 부식 부철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한림직에 제수되어 가문의 영광을 얻었다. 맏이 부필은 윤관과 함께 병마판관으로 여진정벌에 참여하였으며 둘째 부일은 벼슬이 중서시랑문하평장사 셋째 부식은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문하시중에 넷째 부칠은 지추밀원사에 이르렀으니 이자겸의 난 이후에 인종시대에는 이들 형제들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그는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했던 윤언이를 탄핵하여 좌천시켰는데, 1140년 사면령이 내려져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할 기미를 보이자 정치보복이 두려워 세 번이나 사직을 청하여 허락을 얻었다. 그 무렵 그의 형과 동생도 사망하고 없었고 자신의 지지세력들도 거의 탄핵을 받아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별수없이 정계은퇴를 결심했다. 인종은 그의 이같은 쓸쓸한 정계은퇴를 위로하는 차원에서 8명의 젊은 관료를 그에게 보내「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했다. 왕명을 받은 김부식은 5년간의 작업 끝에「삼국사기」를 완성하여 인종이 죽기 2개월 전인 1145년 12월 왕에게 올렸다. 중국의 정사체로 기록된 「삼국사기」는 총50권으로「본기」28권(고구려 10권 백제6권 신라. 통일신라 12권)「志」9권,「表」3권, 「熱戰」10권으로 이뤄졌다. 「삼국사기」는 이들 편찬자들의 독자적인 저술이 아니라 고기, 삼한고기, 신라고사, 구삼국사, 김대문의고승전과 화랑세기, 계림잡전, 최치원의 제왕연대력등의 국내문헌과 삼국지, 후한서, 진서, 위서, 송서, 남북사,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 등의 중국문헌을 참고 하여 기술 되었다. 인종시대 중국은 여진족이 금을 세워 요를 멸망시키고 남하를 계속하여 송을 굴복시킨다. 이에 따라 요는 서쪽으로 쫓겨가고 송은 북송시대를 마감하고 남송시대를 연다. 이시기에 송나라에서 나침판이 발명되고 대장경이 간행된다.
● 윤언이 [尹彦?, ?~1149] -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 파평. 호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 문강文康. 문하시중 윤관尹瓘의 아들. 문과에 급제, 인종때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이어 좌사간 정지상 등과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시정에 반영하게 하였다. 1128년(인종 6) 예부시랑禮部侍郞때 송나라에 가서 국교 재개를 청하고 돌아왔다.1132년 국자사업國子司業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경의經義를 강의, 화서대華犀帶를 하사받았다. 앞서 예종때 아버지가 지은 의천義天의 비문을 김부식金富軾이 함부로 고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1133년 김부식의 주역 강의를 묻 논란하라는 왕명에 정연한 논리로 반박 설분 하였다. 1135년 묘청의 난 때 김부식의 막료로 출전, 공을 세웠으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로 좌천되었다. 그 뒤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이어, 1148년(의종 2)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주역》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저서에 《역해(易解)》가 있다.
● 나침반(1086년, 중국) 배의 방형이나 위치를 알아보는 항해용 계측기로, 화약, 종이와 함께 중국3대 발명품의 하나로 꼽힘. 저절로 남북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일찍이 발견한 중국인들은 여러 형태의 나침판을 제작, 사용하였는데 이에 관한 신뢰성 있는 기록은 11세기 이후의 문헌에서 보임. 중국에서 발명된 나침판은 이후 아라비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래되어 폐쇄적이었던 중세 유럽의 세계관을 타파하고 유럽인들로 하여금 밖으로 눈을 돌려 광활한 세계정복에 나서게 하는 초석이 됨.
● 총(1250년, 중국) 투사체를 쏘는데 사용하는 관의 일종으로, 근대적 의미의 총기는 1040년 중국에서 화약이 발명된 이후 사용 시작. 당시에는 주로 종이 원통 안에 화살을 넣은 뒤 안에서 화약을 폭발시켜 화살을 날리는 비화창 등이 만들어졌으나, 1281년 원나라에 의해 철제포탄을 사용하는 철화포가 최초로 만들어졌고 1288년에는 대포가 등장.
■ 제18대 의종 1127년 -1173년. 재위기간 1146년-1170 24년.
● 향략주의자 의종과 환관정치와 정중부의 난
묘청의 난 이후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즉위한 의종은 왕권을 회복하기위해 친위세력 형성에 주력한다. 이 때문에 환관과 내시들의 힘이 막강해져 그들과 간언들 사이에 치열한 힘겨루기가 전개되고 그 틈바구니에서 멸시 당하던 무신들이 반란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 때문에 모후 공예왕후는 둘째 왕자 경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주장 하였으나 인종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공예왕후는 끈질기게 둘째 왕경을 새롭게 태자로 삼을 것을 간청한다. 이에 인종도 마음이 통하여 그를 폐립할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예부시랑 정습명이 태자 폐립을 반대하며 자신이 의종을 보필하여 정사를 원만히 수행할 수있도록 하겠다고 자청한다. 의종이 왕이 된 이후에 정습명에 의해 철저하게 행동을 규제 받는다. 정습명은 너무 지나치게 왕의 행동을 규제하는 바람에 의종이 점차 그를 꺼리게 된다. 그리고 급기야 의종은 환관과 내시들을 중심으로 자신의 근위 세력을 형성하고 김존중, 정서등을 측근으로 삼아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규제하는 정습명을 정계에서 축출하여 죽여 버린다. 의종은 시를 잘 짓는 내관들과 악공들을 데려놓고 밤새도록 주연을 즐기는 일도 잦았다. 의종은 호위병들의 고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3일에 한 번씩 연회를 배풀었고, 이에 호위병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었고 마침내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 환관정치의 주역 정함과 그 주변 인물들
정함 [?~?] - 고려 의종 때의 환관. 인종 때 內侍西頭供奉官이 되고 의종의 유모를 처로 삼았는데, 의종이 즉위한 뒤 內殿崇班이 되었다. 1151년(의종 5)에 왕비를 德興宮主에 봉하고 벌인 잔치에서 왕이 내린 서대를 불법적으로 띠고 나오자 대관과 마찰했으며, 權知閤門祗候에 임명되자 대관 이 환관으로 朝官에 참여한 적이 없다고 하여 철회시켰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散員 鄭壽開를 시켜 臺省이 왕의 동생 대령후 暻을 추대한다고 무고하고 외척과 朝臣이 대령후와 연결되었다고 참소하였으나, 무고임이 밝혀져 대간을 모했다는 죄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다시 내시에 복직되었는데, 1156년 낭장 최숙청이 정함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었고, 다음해에 권지합문지후에 다시 임명 되어 재상과 간관에게 임명장에 서명하기를 강요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종의 측근으로 계속 성장하여 왕광취· 백자단 등과 함께 권세를 휘두르다가, 1158년 신숙의 파면 요구로 잠시 파면되었다가 다음해에 복직되었다. 김존중은 정함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내시에 소속 되었다가 다시 형부낭중거거주 보문각 동제학에 오른다. 이때 김존중은 정함과 협의하여 대간들을 이끌며 의종의 행동을 규제하던 정습명을 탄핵하여 죽게 만든다. 그러자 정함은 그를 왕에게 극력 추천하여 우승선에 오르게 한다. 우승선에 오른 김존중은 내시 낭중으로 있던 정서를 역모죄로 몬다. 정서는 의종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정서는 대령후 왕경과 왕래가 잦았고, 의종은 그들의 친분이 못마땅해하자, 그러한 의종의 내면을 읽고 있던 정함과 김존중은 정서와 대령후가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 하고 탄핵해서 동래로 귀양 보낸다. 이 귀양지에서 정서는 「정과정곡」등의 고려가요를 남기게 된다. 1156년 김존중이 등창으로 앓아눕자 아부하는 자들이 문병을 하기위해 줄을 섰고 그가 죽자 의종은 심히 슬퍼하였다.
● 정중부의 난과 문신귀족의 몰락
정중부의 난은 고려 관료사회의 무반에 대한 홀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명종 대 이후 백 년간 지속되는 무신정변의 시초가 된다. 광종대 이후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고려사회는 통일전쟁기의 과도기적 관료체제에서 벗어나 문신 중심의 지배 체제를 확립 한다. 이같은 관료체제는 무신의 최고품계로 정3품 상장군에 한정 시켰고 이 때문에 전쟁 상황 속에서도 무신은 언제나 문신출신 상원수의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강동6주를 얻어낸 서희, 귀주대첩의 강감찬, 여진정벌을 단행해 동북9성을 군설한 윤관등이 모두 문신출신이다. 고려의 병권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인종 때에 권력을 독식하던 이자겸의 기형적인 정국운영이 이뤄지면서부터였다. 문신출신인 그가 사병을 육성하여 국가의 군사체제를 동요케 한 것이다. 게다가 인종은 무신 출신인 척준경에게 이자겸의 난을 종식시킨 공로로 정2품의 평장사 벼슬을 내리면서 무신에게 정3품 이상의 벼슬을 내리지 않던 관습이 깨어졌다. 이로써 무신들은 광종 이후 오르지 못할 나무로만 여겼던 재상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으로 무신들이 가담하고 난이 진압되자, 자연히 무신 등의 입지가 약화되고 문신들의 입지가 강화 되었으며 이때부터 개경의 문신들은 무신들을 멸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의종때 와서 왕이 일부 간사한 문신들과 향락을 즐겼고 그러한 경향은 더욱 짙어갔다. 정중부의 난은 바로 이시기에 일어난 다소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무신정변을 주도한 인물은 이의방, 이고, 채원등 하 급장교들 이었고 정중부는 그들의 계획에 동조했을 뿐이다. 하급무장들이 오래 전부터 반란을 꾀하고 있는데 반해 정중부등 고위직 무장들은 반란을 실행할 의지가 없었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정중부의 동의 없이는 난은 성공 할 수가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중부의 공이 결코 적다고 할 수는 없다. 무신의 난 직후 권력을 장악한 세력은 당연히 이의방 등 소장세력이 될 수 밖에 없었다.
▣ 무신의 난 원인
고려 광종 때 과거제도를 채택하면서 문신을 숭상하고 무신을 천시하였다. 특히 성종 이후 대외투쟁에 공헌한 무신은 군의 최고 지휘관에 오르지 못하고 그 직에 문신이 등용된 점, 998년 개정 전시과 제정때 무관의 품계를 낮추고, 1014년(현종 5) 문신 황보유의가 문신에게 줄 녹봉이 부족하다 하여 경군에게 지급할 영업전을 박탈하자, 이에 격분한 무신 최질·김훈 등이 반기를 들고 황보유의·장연우 등을 귀양 보내고, 일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가도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인종 때는 무신 교육기관인 무학재를 폐지하였다. 묘청의 난 이후에는 무신 멸시풍조가 더욱 조장되어, 무신의 대우는 役夫와 같았다. 특히 의종은 향락생활에 도취하였고, 문신의 교만은 극심하였다. 김돈중은 아버지 부식의 권세를 믿고 견룡대정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웠으며, 의종의 보현원 행차 때 대장군 이소응이 젊은 문신한뢰에게 뺨을 맞는 모욕적인 일이 생겼다. 이에 분노한 정중부는 이의방·이고 등과 함께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하여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귀양 보내고, 왕의 동생 익양공 호를 왕으로 맞이하였는데, 이가 명종이다. 1170년 정중부가 집권하여 무신독재 정권을 확립하였으나, 무신간의 반목으로 정중부는 1179년 경대승에게 살해되고, 집권한 경대승은 1183년에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놀라 병사하자 천민 출신 이의민이 13년간 집권 하다가, 1196년 최충헌 형제에게 살해되었다. 최충헌의 집권에 이어 최우·최항·최의가 대를 이어 집권하였다. 1258년(고종 45) 유경·김준에게 최의가 살해되어, 4대 62년 만에 최씨 무단통치는 끝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김준 → 임연→ 임유무 등의 무신세력은,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이와 같이 90년간의 무신통치로 농장 확대, 노비 증가, 사회질서 붕괴, 하극상 풍조로 인한 천민의 난 등으로 암흑시대가 출현하였다.
▣ 김돈중이 정중부 수염을 태운사건
'고려사' 에 보면 경인년의 무신란, 즉 무신 정권의 시초가 되는 정중부와 이의방이 보현원에서 난을 일으킨 배경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정3품 내시(궁내의 벼슬이름,환관 내시가 아님)였던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견룡대정(친위부대 수장)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이 일어난다. 정중부의 수염은 매우 아름다워 궁중연회 때 의종이 정중부의 수염을 보고 가히 대장군감이라며 칭찬을 했다. 업신여기던 무신을 임금이 칭찬하니 문신들은 그 광경을 보자 정중부을 시기하게 됐고 그 사건은 궁중연회 중 갑자기 바람이 불고 촛불이 꺼지자 김돈중은 '이때다' 하고 초에 불을 붙여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다. 정중부는 놀라 앞에 있는 사람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고, 불이 켜지고 보니 맞은 사람은 김돈중이 였다. 이때 연회를 호위하던 무신들이 분노하여 칼을 빼들으려 했지만 정중부는 일이 크게 벌어질 것을 두려워해 눈짓으로 말린다. 한편 자기아들인 김돈중이 정중부에게 맞는 것을 본 김부식이 문신들의 공론을 모아서 왕에게 정중부에서 벌을 물으라고 했습니다. 의종은 반대했지만 김부식의 권력이 너무 막강한 나머지 정중부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다. 의종 24년인 1170년 8월 30일, 왕이 장단 보현원에 행차할 때 비바람이 부는 날 왕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마차가 구렁에 빠져 있을때 문신 한뢰가 직제상의 상관인 대장군 이소응에게 빨리 마차를 일으켜 세우라며 명령을 내리자 이소응이 한뢰에게 주의를 주게되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빰을 쳐서 층계에서 떨어지고 여러 무신들이 이소응을 부축하여 정중부에게 보고한다. 분노한 정중부와 무신들은 그 날 저녁에 난을 일으켜 “무릇 문관을 쓴 자는 서리까지도 씨를 남기지 말고 없애라” 하고는 김돈중과 한뢰 등 많은 문신들을 죽였으며, 의종을 거제도에 귀양 보내고 왕제 익양공(명종)을 세웠다. 무신들은 왕을 수행하던 문신들을 학살한 뒤 개성으로 돌아가 요직에 있던 문신들을 다시 대량 학살하였다.
■ 제19대 명종 1131년-1202년. 재위기간 1170년-1197년. 27년간. 40세 즉위.
● 허수아비 임금 명종과 무신들의 정권다툼.
정중부의 반란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무신정권의 시대로 접어든다. 왕은 존재하나 힘이 없고 모든 권력은 일부 무신들이 장악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는 가운데 곳곳에서 반란사건이 잇따른다. 이로 인해 국가기강은 무너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경제는 파탄지경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명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모든 권력은 난을 일으킨 무신들이 쥐고 있었고 명종은 그들 무신들의 권력싸움의 틈바구니에 끼어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그만큼 그는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명종은 즉위하자 곧 정중부, 이의방, 이고등을 벽상공신으로 삼아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이고 양숙 채원등은 그다음 자리에 두게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은 중방을 설치하 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조정을 독점하기위해 각기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 무신정권을 풍미한 인물들.
온건파 - 정중부, 양숙, 진준, 기탁성, 이소응, 홍준방등 무반 고위인사들.
강경파 - 이의방, 이고, 채원등 하급 무장들.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채원등이 모의하여 보현원 오문앞에서 임종식, 이복기등을 죽이고 정변을 일으킴. 한뢰, 김돈중을 비롯한 문관들과 왕광취등 환관들을 참살하고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추대.
1171년 이고가 무리배들과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하나 김대용의 밀고로 이의방에게 누설돼 살해 되고 이후 채원도 반란의 소지가 있다 하여 살해된다.
1172년 귀법사 승려 백여명이 이의방을 타도하고자 도성 북문으로 침입했으나 이의방이 즉시 출동하여 공략하니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의방은 중광사, 홍법사, 용흥사등을 약탈해서 승려들의 기를 꺽었다.
1173년 김보당의 난 - 도북면 간의대부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벌하고 의종을 복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군사를 일으키나 정부군에 대패하고 김보당이 생포되어 저잣거리에서 살해되고 문신들도 대거 학살됨. 이 사건으로 유배 가있던 의종은 경주에서 이의민에 의해 허리가 꺾인 채 살해된다.
1174년 조위총의 난 - 의종을 시해한 이의방정권을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1174년부터 2년 동안 평양을 중심으로 무신정권에 대항해서 일어난 대병란.
174년 이의방살해 -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승려 종강과 모의하여 이의방을 살해함으로써 정권은 정중부에게로 넘어간다.
176년 망이 망소이의난 - 공주 명학소에서 일어난 천민집단의 난.
1179년 정중부 부자 살해 - 경대승, 허승등이 모의하여 정중부 부자를 살해하고 그의 측근들을 제거함. 중방을 무력화하고 도방을 설치해서 측근을 배치하고 경대승의 정권이 4년간 간다. 이때 그의 나이는 26세. 1183년 정중부의 귀신을 보고 놀란 경대승이 갑자기 죽자 정권은 이의민에게로 넘어감. 정권을 장악한 이의민의 집권은 13년간이나 지속된다.
1183년 경대승 죽음 - 이의민이 정권을 잡음.
1196년 이의민 살해 -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최충수의 집비둘기 강탈사건으로 앙심을 품고 최충헌과 모의하여 이지영을 비롯한 이의민 일가와 그 측근들을 살해하고 이후로 최씨의 무신정권은 60년간 지속된다. 1196년 최충헌 정권잡음
최충헌 - 최이(우) - 최항 -최의에게로 4대에 걸쳐 집권함.
● 무신 집권기의 지배 기구
중방 : 무신 정권 초기의 권력기구
교정도감 : 최씨 정권 내의 최고 권력기구
정방 : 최이가 만든 인사 독점 기구
도방 : 경대승이 만든 사병 기구
삼별초 : 최이가 만든 사병 기구 . 야별초-> 좌별초, 우별초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확대
■ 제20대 신종 1144년-1204년 재위기간 1197년 - 1204년. 6년 집권. 54세 즉위.
● 늙은 왕 신종의 즉위와 최씨 무신정권의 성립
신종시대에는 최씨 무신정권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닦는가 하면 전국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아 고려사회는 건국이래 최악의 상태를 맞이한다. 최충헌 형제와 그의 측근들은 명종을 제거한 후 차기왕으로 사공 왕진과 평양공 왕민중 한 사람으로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논의 끝에 금나라 에서 사공 왕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왕위를 찬탈했다는 의심을 살 염려가 있으므로 의종의 전례에 따라 왕민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박진재의 판단에 따라 결국 왕민이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금나라 에서는 왕위찬탈 의혹이 있다면서 몇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명종을 대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충헌 등이 명종은 요양차 아주 먼 곳에 있기 때문에 30일 이상 걸어야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하여 신종은 가까스로 금나라 왕의 책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신종은 이름뿐인 왕이었고 조정 대소사의 모든 결정권은 최충헌을 비롯한 그의 측근들이 다 쥐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자기들끼리 알력이 생겨 마침내 치열한 싸움으로 이어졌다. 최충수는 최충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하다가 최충헌에게 죽음을 당하고 박진재도 후에 지나치게 권력을 확장시키다가 최충헌 에게 양쪽다리의 심줄이 잘리는 형을 당하고 유배되어 죽었다. 최충헌은 이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혈육도 가차없이 죽이는 모습을 보이며 독재정치를 구현해 나갔다. 최충헌은 1197년 상장군으로 오른 그해 추밀원지주사등 거듭 승진되었고, 1203년에도 거듭 승진을 하게 되자 조정의 병권 및 인사권등 행정권을 완전히 장악한다. 이로써 최충헌은 장기집권의 토대를 구축하였고 고려 왕실은 점점 힘을 상실하여 왕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공포정치를 실시하며 조정을 독식하던 그는 1203년 중서문하 평장사에 올랐다가 1205년 만인지상 일인지하인 문하시중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이규보를 등용하여 정중부의 난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던 문인들을 등용하였으며 1209년 도정교감을 설치하여 국정전반을 그 곳에서 처결하였다. 1211년(희종7년) 예시낭중 왕준명등이 궁궐 내에서 그를 살해하려는 음모에 휘말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일을 방관한 희종을 내쫓고 그의 아들 강종을 세웠다. 이후 1218년에 70세가 되어 스스로 치사할 것을 청원하였으나, 강종은 그에게 칠순이 넘도록 관직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궤장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 병이 들자 그는 궤장을 반납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만적의 난 - 1198년(고려 신종 1)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키려다 미수에 그친 노비해방운동. 고려 중기에 일어난 무신의 난은 당시의 신분계급에 큰 변동을 일으켜 하극상의 풍조가 유행하였다. 그리하여 중앙과 지방, 상층계급과 하층계급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결국은 농민과 노예에 의한 반란까지 유발시켰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대규모적이고 목적이 뚜렷하였던 것이 만적의 난이다. 만적은 당시의 집권자인 최충헌의 사노(私奴)로서 6명의 노예와 함께 당시의 서울인 개경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公私)의 노예들을 모아놓고 난을 일으킬 의논을 하였다. 그는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공경대부(公卿大夫)는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筋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文籍)을 불질러, 우리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의 선동연설을 하였다. 그 자리에 모였던 노예들은 만적의 연설에 찬성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즉, 황지(黃紙) 수천 장을 ‘丁’자 모양으로 오려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날짜를 정하여 흥국사 뜰에 모여, 官奴들의 호응을 받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관노들은 조정의 청사 내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들은 개경 성내에서 먼저 최충헌 등의 자기 상전을 죽인 후, 노비문적을 불태워버리고 자기네들이 집권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에 모인 노예는 몇 백 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날짜를 다시 정하고 이번에는 보제사에 모이기로 속하였다. 그러나 율학박사(律學博士) 한충유(韓忠愈)의 사노 순정(順定)이 이 계획을 상전에게 밀고하여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이리하여 만적을 비롯한 수백 명의 노예들이 체포되어 모두 강물에 던져져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반란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銀) 80냥(兩)을 상금으로 받고, 또 양민(良民)으로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閤門祗候)라는 높은 관작을 받았다. 만적의 난이 비록 실패하였으나, 당시와 같이 신분계급이 엄격한 시대에 그들이 품었던 생각, 즉 계급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 했던 그 구상과 그들이 나타낸 투쟁의욕은 높이 평가된다.
■ 제21대 희종 1181년-1237년. 재위기간 1204년-1211년 7년.
● 왕권 회복을 꿈꾸는 희종과 최충헌 제거계획
희종 역시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의해 이루어 졌다. 하지만 희종은 신종과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 명분이 분명했다. 이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제거 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 되기 시작했다. 희종 즉위년에 최충헌부자를 살해하기위해 급사동정 지귀수의 집에 모여 모의하다가 발각 되었고, 1209년에도 청교역리 3명이 최부자 살해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 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 범인들을 색출하기위해 임시로 설치된 교정도감은 후부터 무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최충헌은 스스로 교정도감의 별감으로 있으면서 그 곳에서 모든 국사를 처리 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최의, 최항, 최의가 교정별감직을 세습하여 왕권을 대신하게 된다. 1211년 그 동안 최충헌의 왕권능멸을 지켜만 보고있던 희종은 측근 내시들과 모의해 최충헌 세력을 제거하고자 거사를 결행한다. 최충헌이 왕을 배알하기위해 수창궁으로 찾아 들었고 희종은 그를 데리고 내전으로 들어갔다. 중관 내관들이 최충헌 수하들을 궁궐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자 미리 잠복 하고 있던 10여명의 승려와 무사들이 그들을 습격하였다. 때문에 내전복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최충헌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자객이 들이 닥친 것으로 판단하고 희종 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 하였으나 희종은 내실의 문을 닫고 최충헌을 내실로 들이지 않았다. 이에 최충헌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급한 김에 지주사 다락에 몸을 숨겼고, 그의 수하들이 내전으로 달려가 최충헌을 구했다. 최충헌을 구한 김약진은 궁궐로 군사를 몰아 임금을 비롯한 모든 내인들을 죽이려 하자 최충헌은 이를 만류하며 자신을 제거하려 한 왕준명 등 중관들 을 체포하여 모두 죽이거나 유배시키고 이들의 모의를 후원한 희종을 폐위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다. 희종은 유배지를 떠돌다가 노년에 법천정사로 옮겨 1237년 5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제22대 강종 1152년-1213년. 재위기간 1211년-1213년 1년. 60세에 즉위함.
● 강종의 황혼녘 짧은 치세
강종은 명종과 의정왕후김씨의 맏아들로 1173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 최충헌에 의해 명종이 쫓겨날 때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1210년에 개경으로 돌아왔으며 1211년 한남공에 봉해졌다가 12월에 최충헌이 희종을 폐위시키고 그를 옹립함에 따라 60세에 즉위하였다. 그는 부왕 명종이 강제로 퇴위됨에 따라 14년 동안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따라서 그에게 왕위가 넘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는데 희종이 왕권회복을 위해 최충헌을 제거 하려다 가 실패하는 바람에 환갑을 앞둔 나이에 곤룡포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유배생활로 몸은 병이 들었고 1213년 지병으로 병상에 누워 태자 진(고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강종에 대해 사관은 "강종이 임금으로 있을 때 일체정사는 강신들의 통제를 받았으며 갑자기 병에 걸려 국왕으로서 행복을 누린지 며칠되지 않으니 슬픈 일이로다". 라고 평가하고 있다. 사평왕후 이씨는 이의방의 딸이다. 강종이 태자로 있을 때 이의방의 권세에 의지하여 1174년 3월에 태자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그 해 12월 정균에 의해 이의방이 살해 되면서 입궁 9개월만에 대궐에서 쫓겨났다. 그 후 강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후에 추존되었다.
■ 제23대 고종 1192년-1259년. 재위기간 1213년-1259년. 45년.
● 고종시대의 계속되는 변란과 대몽 항쟁
최씨 무신정권이 안정기로 접어든 고종시대는 몽고의 중흥기로 고려를 비롯한 아시아국가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다. 서쪽으로 밀려났던 거란이 다시 동으로 쫓겨 왔으며 남으로 밀려났던 송이 망국에 직면하고 북쪽의 맹주로 자리한 금도 몰락한다. 몽고의 이같은 무서운 팽창정책에 맞서 고려는 수십 년 동안 영토수호 전쟁을 수행하고 무신정권 내부에서는 권력투쟁이 이어지고, 왕실은 무신들 의 암투를 이용하여 왕권을 회복하려 한다. 1218년 거란의 침입이 있자 고려조정은 몽고, 동진, 금 등과 연합하여 거란군을 격퇴키로 결정하고 1218년 12월 합진과 찰라가 이끄는 몽고군 1만과 동진의 군사2만이 연합군을 형성하여 화주, 맹주, 순주, 덕주 등을 무너뜨리고 거란의 본거지인 강동성으로 향하자 김취려와 조충이 이끄는 고려군도 이들과 합세하여 강동성을 애워쌓다. 이에 거란군은 한 달간을 버티다가 1219년 정월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에 몽고는 고려에 강화를 청하였고 형제지국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 후 몽고군이 돌아가면서 수하 40여명을「다루가치」 의주에 남겨 두었고 이 때문에 고려 전역엔 '가을에 몽고군이 다시 온다' 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 와중에 1219년 실권자 최충헌의 병이 악화되었고 후계자를 놓고 최우와 최항이 다툼을 벌였다. 최충헌의 측근인 대장군 최준문, 상장군 지윤심, 장군 유송절, 낭장 김덕명등 4인이 최우를 없애고 최향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다가 되레 최우에게 당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향, 최향의 장인, 처남, 노비 등이 유배 되었으며 그 해9월 최충헌이 죽자 국정 전반에 관한 모든 실권은 최이에게로 넘어갔다. 한편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은 몽고는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고압작인 자세로 공물을 요구하였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최이는 몽고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1221년 의주, 화주, 철령등지에 성을 쌓게 하였다. 그런데 1225년 정월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는 길에 도적들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고는 고려의 소행으로 보고 보복을 선언했다. 이 때문에 양국간에 국교가 단절되고 긴장이 강화됐다. 이때 경상도 지방에 왜구들이 침입하여 민가를 괴롭히자 조정은 일본정부와 우호관계를 맺고 왜구를 소탕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죽자 몽고족의 풍습에 따라(말자상속) 셋째 아들 오코타이가 칸에 선출 되지만 일찍 죽고 징기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칸이 되어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고 원을 세우고 몽고 제일주의 즉 민족차별 정책을 썼다. 몽고는 1231년 살리타의 지휘아래 압록강을 건너 왔으며 이는 7차례에 걸쳐 28년 동안 지속적으로 자행된 고려침략의 서막이었다. 1231년 몽고가 대군을 이끌고 제1차 침입을 감행했다가 화의약조를 하고 물러가자 최우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들을 섬과 산성으로 이주시켜 몽고군과 전면전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강화도로 이어 하는 것을 반대하고, 최우는 강화도로 옮겨야 된다고 강요하는데도 불구하고 궁궐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최우는 녹전차 백여대를 동원하여 자기집 재산을 모두 강화도로 운반토록 하고 기일을 정하여 궁궐의 모든 기관을 강제로 강화도로 가도록 하였다. 그는 강화도로 떠나지 않는 관리들은 모두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동시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강화도에 궁궐을 축성하였다. 최이의 강압에 못이긴 고종도 어가를 타고 강화도의 새 궁궐로 들어갔다. 고려의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몽고는 다시금 대병력을 보내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후부터 약30년간 몽고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1232년 서북면과 서경에서 몽고 잔병인 다루가치를 습격하자 이에 자극을 받은 몽고는 2차 침입을 시도하고, 고려군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며 군관민이 단결하여 싸웠다. 그해 12월 수원의 처인성에서 김윤후가 몽고원수 살리타를 살해했고 이에 몽고군은 당황하여 서둘러 철군하였다. 1247년 몽고군은 고종의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다시 침입을 했는데 이때 몽고 왕이 죽었다는 연락이 오자 그들은 곧 철수하였다. 1249년 11월 최우가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후계를 이었는데 최항도 최이와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구도에 큰 변화는 오지 않았다. 몽고군은 1251년 다시 출륙환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고종도 환도의 뜻을 품었지만 최항의 반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1253년 몽고군은 제5차 침입을 강행했고 고종이 몽고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승천부로 나와 몽고 사신을 맞이함으로써 다시한번 몽고군은 철군하였다. 그 뒤 몽고군은 끈질기게 고종의 출륙환도를 주장했고, 고종은 화의조약을 얻어내기 위해 김수강을 몽고 왕에게 보냈고 김수강의 뛰어난 언변에 감탄한 몽고왕은 고려국왕의 친조와 출륙환도를 다짐받고 철군을 단행했다. 최항은 몽고왕의 친조는 물론이고 출륙환도도 미뤘으며 해마다 보내던 공물도 중단시켜 버렸다. 이무렵 최항은 중병이들어 병상에 누웠고 1257년 윤사 월에 서자 최의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죽었다. 1257년에는 몽고군이 제7차침입을 강행해왔고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던 몽고는 수위를 낮춰 태자의 입조로 대신할 것을 제의했고, 이에 따라 양국간의 강화가 성립되는듯했다. 하지만 고려에서 태자가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며 안경공창을 대신 보내자 몽고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1258년 4월 유경, 김인준등에 의해 최의가 피살됨으로써 그 동안 몽고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취하던 최씨 무신 정귄이 무너졌다. 그 해12월 고려조정은 박희실과 조문주를 몽고에 보내 최이의 죽음을 알리고 출륙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이듬해 왕태자가 40여명의 대신들과 함께 몽고에 입조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어 28년 동안 지속되던 여몽전쟁은 완전히 종결됐다.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숱한 전쟁을 겪다가 몽고와 화의조약을 맺던 1259년 6월 강화도에서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삼국지연의, 수호지, 동방견문록 등이 이 원나라를 보고 작성했다. 1271년 몽고는 원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원 제국 성립하고 남송 명망시킴. 또 고려의 왕족들은 원에 볼모로 잡혀 그 곳에서 원의 왕실과 결혼을 해야 했고, 결국 원은 고려를 자신들의 부마 국으로 삼으려 했다.
● 전란중에 핀 연꽃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고종 때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만든 목각판으로 현재해인사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정식 명칭은 「해인사고려대장도감판」이다.「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고 매수가 8만여판에 달하고 8만4천 번뇌를 풀어내는 8만4천 법문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팔만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고 대장경판각사업을 통해 전 백성의 뜻을 하나로 모으려는 일종의 정신교화라 할 수있다. 팔만대장경은 단순히 8만4천의 법문을 담고 있는 경전이 아니라 고려인들의 민족적 자긍심과 국가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정신적 산물이며 여몽 30년 전쟁이라는 뻘구덩이 속에서 피어오른 눈부신 연꽃이었다. 고종실록을 편찬한 사관들은 고종의 치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있다. "고종시대에 안으로는 권세를 잡은 가신들이 잇따라 나라의 명령을 제 마음대로 하였고 밖으로는 여진과 몽고가 해마다 군사를 보내어 침범하였으니 당시 나라형세는 상당히 위태로웠다. 그러나 왕이 조심스럽게 법을 지키고 수치를 견디고 참았기 때문에 왕위를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정권이 왕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적이 들어오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고 적이 물러가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맺었으며 심지어는 태자를 시켜 예물을 가지고 직접 몽고에 들어가게 하였던것이다.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직을 유지하고 나라를 길이 보전할 수 있었다.
■ 제24대 원종 1219년-1274년. 재위기간 1259년 1274년 15년. 41세-56세.
● 원종의 친원정책과 무신정권의 종식
원종시대는 무신정권의 말기이자 원의 고려복속정책이 본격화 되던 시기로서 고려조정은 왕실중심의 친몽파와 무신들이 이끄는 반몽파로 갈라진다. 원종은 1241년 태자에 책봉되고 1259년 4월 몽고와의 화의정책에 따라 고종을 대신해서 몽고에 입조했다. 그 해 6월 고종이 죽자 실권자 김준은 고종의 둘째 안경공창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자 1259년 6월 원종은 41세의 나이로 왕에 올랐으며, 그가 몽고에 가있는 동안 김준 등 무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태손 심이 왕위를 지키고 이듬해 3월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와 비로소 왕위를 받았다. 원종이 몽고를 방문 했을 때 몽고는 쿠빌라이와 아리패가가 왕위를 놓고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헌종의 아우 쿠빌라이를 찾아갔는데 쿠빌라이는 신하들의 조언에 따라 그를 일국의 왕으로 대접하였다. 이는 대륙의 모든 나라가 몽고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복을 하였는데, 오직 고려만이 30년을 항전하며 항복하지 않는 것에 대한 특별한 대우였다. 후에 쿠빌라이는 자신의 딸과 충렬왕(태자심)을 결혼시켜 사돈관계를 맺게 한다. 고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수하 속리대로 하여금 원종을 호위하게 하였고 이같은 쿠빌라이의 호의적인 태도를 접한 원종은 그 후부터 다소 친몽적 경향을 띠게 된다.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진 이후 왕은 형식적으로는 왕권을 되찾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힘이 없었다. 원종은 몽고측의 출륙환도와 무신들의 강화도 고수 주장 사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내심 몽고의 힘을 이용하여 무신들에게 뺏긴 정권을 환수하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의지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같은 의지는 무신들의 강한 반발로 한동안 실행되지 못한다. 새로운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사람은 김준이었다. 최의를 제거하던 당시에는 유경이 권좌에 있었으나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과장에서 난을 실질적으로 주도 했던 김준이 유경을 밀어 내고 권좌에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강화 궁궐에 도착한 원종은 정사는 뒷전으로 미루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 한편으로는 무신정권을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하려는 전략적 차원에서 몽고와의 유대관계 강화에 주력 한다. 원은 1268년 고려에 송나라 정벌을 위한 원군을 요청하였고 김준 부자 및 아우 김충으로 하여금 원병을 이끌고 연포로 올 것을 요구했는데 김준은 몽고에 가면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생각에 원나라 사신을 죽이고 성으로 들어가 항전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원종은 김준의 이같은 의견에 반대 했다. 그러나 그 후 김준 부자와 김충은 몽고를 다녀왔고 이후 김준과 원종 관계는 매우 악화 된다. 김준은 몽고의 사신을 영접하는 일이 없었고 몽고의 요구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몽고 사신에게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원종은 김준을 극도로 미워하였고 급기야 1268년 12월 원종은 임연을 시켜 김준과 김충을 살해케 했고 김창세, 허인세 등의 도당들도 함께 제거되자, 원종은 개경환도를 서두르며 친몽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무신정권을 이끌고 있던 임연은 원종의 이같은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임연은 재상들을 모아 원종을 폐립하기로 결정하고 왕의 친서 형식을 빌어 원종의 병이 위독하여 안경공 창에게 선위 한다는 서신을 원나라에 보냈다. 그리고 1274년 6월 원종을 폐위하고 창을 왕으로 세웠다. 이때 태자 심(충렬왕)은 몇 개월 전에 몽고로 떠나 그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국왕폐립 사건에 대해 추궁하고 몽고측은 원종과 안경공창, 임연 등을 연경으로 호출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지자 임연은 그 해 11월 대신들과 의논한 뒤 안경공을 폐위하고 원종은 5개월만에 왕위를 회복시켰다. 며칠 뒤 원종은 왕창과 함께 쿠빌라이의 호출에 호응하여 몽고로 떠났다. 1270년 원종은 몽고에서 돌아오면서 바로 개경환도를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류무는 방호사 및 각 산 성별감들을 각지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육지로 나오지 못하게 함으로써 개경환도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에 원종은 임유무를 제거한다. 이로써 일 백년 동안 지속되던 무신정권은 종식되었고 40년 가까이 머무르던 강화도 궁궐시대도 끝이 났다. 1273년 마지막 반몽세력인 삼별초가 몰락하자 고려조정은 거의 원에 복속 되었으며, 1274년에는 원나라의 매빙사가 와서 남편이 없는 부녀자 140명을 요구하자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민간에 혼자 사는 여자와 역적의 처, 노비의 딸 등을 뽑아 원에 공녀로 보내는 처지가 된다. 또한 이해에 태자 심이 원의 부마가 됨으로써 고려에 대한 원의 입김은 더욱 강화된다.
● 무신정권 1기 형성기 -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2기 심화기 -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3기 해체기 - 유경, 김인준, 임연등 김인준(김준)은 최충헌의 노비 김윤성의 아들임. 1264년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군권 및 감찰권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1265년엔 문하시중이 됨.
● 원의 고려복속 정책과 삼별초의 난
1270년 6월 삼별초는 장군 배중손과 야별초들이 이끌고 있던 노영희의 지휘아래 반란을 일으키고 승화 후 왕온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같은 삼별초의 반란은 반몽 감정이 깊어진 고려 하층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일반 민간은 고려 왕실이 친몽적 경향을 띠며 출륙환도를 단행한 것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보였고 삼별초는 이같은 민간의 동향을 기반으로 반몽세력을 규합하려 했던 것이다. 삼별초는 강화에다 관부를 설치하고 강화도에 남아있던 귀족들을 모두 배에 태워 진도로 이송시켰다. 이에 조정은 무척 당황하였다. 몽고군은 원래 해전에 약했고 고려 정부군은 삼별초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별초는 진도 거제도등 도서해안과 남해, 마산, 동래, 김해 등지에서도 강력한 군사활동을 벌였다. 1270년 여몽 연합군과 삼별초간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역전에 역전이 거듭되고 1271년 몽고 지휘관 홍다구가 고려 정부군과 함께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한다. 이때 배중손이 전사하고 승화 후 왕온이 홍다구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삼별초는 대단한 타격을 입는다. 또한 11월에는 제주도를 공략하여 새로운 거점 확보에도 성공하였다. 1273년 2월 여몽 연합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 계획을 수립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이때 연합군 함선 160척, 수륙군은 1만명 이었다. 이같은 대공세에 밀린 삼별초는 계속 후퇴하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삼별초를 이끌고 있던 김통정은 그해 4월에 전사하였고 잔여 삼별초 1천3백 여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이로써 삼별초 난은 반기 3년만에 완전히 종결되었다. 삼별초의 난은 단순히 무신정권을 수호하려는 군사 반란의 차원을 넘어선 고려 백성들의 대몽 자주 전쟁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삼별초의 난이 몽고군의 입지를 강화시켜 몽고의 고려복속정책을 가속시킨 면도 없지 않았다.
■ 제25대 충렬왕 1236년-1308년. 재위기간 1274년-1298년1월. 1298년 8월 복위-1308년7월 39세 -73세.
● 변발한 충렬왕과 원의 부마 국으로 전락한 고려
원 세조의 부마가 된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친원 정책덕분으로 고려 왕실은 오히려 무신정권에게 잃었던 힘을 회복하게 되고 이에 따라 조신들의 힘은 미미해져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 전반에 변발과 호복 차림의 몽고 풍속이 만연하여 고려는 점차 자생력을 잃어 간다. 충렬왕은 1259년 6월 고종이 죽자 몽고에 입조해있던 원종을 대신해 임시로 국사를 대리 하였으며 1267년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1272년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으며 1274년 원 세조의 딸 제국대장 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되었다. 친원 정책을 표방한 충렬왕은 즉위 4개월만에 원의 요구로 일본 정벌을 단행한다. 일본 정벌을 위해 몽고군과 한족 연합군 2만5천을 동원하였고 뱃길 안내자 및 수군 6천7백명이 가세하여 총 4만여 군사가 9백여척의 배에 나눠타고 일본 정벌길에 올라 대마도를 장악하였다. 하지만 태풍으로 인해 일본 본토로 나가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원은 다시금 일본 정벌을 준비하기 위해 정동행성을 설치하고 1281년 에는 15만의 여원 연합군을 형성하여 일본으로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도 태풍우로 인해 본토 진입에 실패하고 원 세조는 지속 적으로 고려 조정에 일본정벌을 강요하여 민간의 피해가 극에 달했다. 그런 가운데 1290년에는 원을 괴롭히고 있던 내안의 합단군이 고려에 내침하여 충렬왕이 조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 하는 지경에 이런다. 합단은 한때 원주와 충주를 함락하고 개경을 위협하는 등 고려군을 궁지로 내몰았으나 원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1년 반만에 종결됐다. 설상가상으로 북방야인과 왜구들의 침입마져 잦아졌고 고려사회는 더욱 불안 해지기 시작한다. 원은 고려의 행정관제를 자신들보다 격하시킬 것을 주장하고 묘호에 조나 종 대신에 왕을 붙이도록 했고 왕의 시호 앞에는 일괄적으로 충자를 붙이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宣旨는 王旨로 짐朕은 고孤 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는 세자로 격하되었다. 충렬왕은 점차 몽고에서 배운 사냥에 빠져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국고를 탕진하였으며 그의 총애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던 궁인 무비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졌다. 이 때문에 제국대장 공주와 세자 원의 반발이 심했지만 충렬왕의 잦은 사냥과 폐행은 계속되어 일부 신하들의 권력독식이 심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충렬왕과 세자간에 알력이 생겼고 세자는 1296년 원에 가서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에게 장가들어 원의 부마가 된다. 이듬해 5월 세자원의 모후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하여 충렬왕과 세자간의 알력은 더욱 심해진다. 세자원은 그해 7월에 귀국하여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 등을 죽이고 그들의 도당 40 여명을 귀양 보낸후 다시 원나라로 떠난다. 이로써 원 왕실은 세자 원을 지지하게 되고 충렬왕은 스스로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겠다는 글을 원에 보낸다. 충렬왕이 물러남에 따라 1298년 1월에 세자원이 즉위하여 왕위에 오르니 그가 충선왕이다. 하지만 충선왕은 고려 제도를 복원 하는등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려고 하다가 왕비인 계국대장공주가 원에 무고하는 바람에 즉위 7개월 만인 그 해 8월에 국새를 빼앗기고 왕위는 다시 충렬왕으로 넘어가고 충선왕은 원으로 압송당한다. 이후 충렬왕은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위해 왕위를 10촌 종제인 서흥 후 전에게 계승시키고 계국대장공주를 그에게 개가 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그는 이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1305년에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2년간 머물기도 하였다. 그러나 1307년 정월에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이 무종의 옹립에 공을 세워 힘이 강해지는 바람에 이 계획은 무산 된다. 무종의 신망을 얻은 충선왕은 그 후부터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아직 태자로 있던 무종의 힘을 빌어 그 동안 자신과 부왕 사이를 이간질 시키던 왕유소, 송영방, 송린, 한신, 송균, 김충의, 최연 및 그 일당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충렬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모든 정사는 충선왕이 주관하게 된다. 아들 충선왕을 제거하기 위해 원나라 행을 강행했던 충렬왕은 비참한 몰골로 1307년 4월 귀국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308년 7월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 일연과 삼국유사
삼국유사 [三國遺事]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 이계복에 의하여 중간된 정덕본이 최고본이며, 그 이전에 판각된 듯한 영본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이므로 체재나 문사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는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라고도 일컬을 만하며, 특히 향찰로 표기된《혜성가》등 14수의 신라 향가가 실려 있어 《균여전》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루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의 실증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 최남선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 제26대 충선왕 1275년 -1325년. 재위기간 1298년 1월-8월. 1308년 7월-1313년. 총 5년3개월.
● 충선왕의 傳旨 정치와 고려 조정의 불안정.
원 세조 쿠빌라이의 외손자인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려의 몽고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심지어는 왕이 재위기간 대부분을 원나라에서 기거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 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의 불안은 한층 가증되고 한편에선 왕위를 둘러싼 암투가 진행된다. 충선왕은 즉위 후 2개월을 제외한 재위기간 전부를 원나라 연경에서 보냈고 이로 인해 고려조정은 항상 불안한 날을 보내야 했다. 충선은 1277년 1월 3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298년 정월에 태상왕으로 물러난 충렬왕을 이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르지만 왕비 계국공주와의 불화로 그해 8월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나라로 압송되었다가 1308년 7월 충렬왕의 뒤를 이어 복위하였다. 충선왕은 즉위하자 관제개혁을 실시하고 고려관제를 복구하는등 다소 반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일명 '조비무고사건' 으로 불리는 일이 발생한다. 세자비 였던 조인규의딸 조비와 충선왕의 금실이 너무 좋자 이를 시기한 왕비 계국공주에 의해 발생한다. 계국공주는 조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독차지하자 이를 질투하여 편지를 써서 원의 황태후에게 전하게 된다. 공주는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하여 자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으며 관직을 변경하여 반원적 차원에서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그 결과 조비를 비롯한 최충 소와 장군 유온이 순마소巡馬所 에 갇히고 조인규와 그의처 는 원나라로 압송되었다. 원나라로 압송된 조인규는 고문을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을 하였고 조비와 내관 이온이 다시 원으로 압송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충선왕은 궁지에 몰리고 충렬왕 지지세력이 충렬왕의 복위를 도모한다. 이 때문에 1298년 8월 충선왕은 즉위 7개월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원으로 호송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충선왕이 새롭게 설치했던 관청과 관직도 모두 혁파되고 충렬왕대의 것으로 복원되었다. 원으로 호송된 충선왕은 그 후 10년 동안 연경에 머문다. 그리고 충선왕은 원 왕족간의 왕위다툼에 가담하여 나름대로의 세력을 형성하고 이었고 자신이 지지하던 무종이 차기 왕으로 유력시되자 사태는 반전 되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에 갔던 충렬왕은 되레 충선왕에 의해 왕유소 등의 측근들을 모두 잃고 왕권 마져 상실한다. 그리고 1308년 7월 충렬왕이 죽자 충선은 다시 왕좌에 앉는다. 10년만에 왕위를 되찾은 충선왕은 즉위하자 조신들의 기강을 확립하고 조세의공평, 인재등용의 개방 공신자제의 중용, 농장업의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횡포 엄단 등 혁신정치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생활에 익숙해 있던 그는 고려의 왕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지 즉위 두달만에 숙부인 제안공 왕숙에게 정권을 대행케 하고 다시 원으로 건너갔다. 때문에 개혁안은 허사가 됐고 고려 조정은 연경에 머무는 충선왕의 傳旨 에 의해 국정 전반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조신들은 개경과 연경을 오가며 국정을 수행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전승 최유업이 극언으로 귀국할 것을 상소 했지만 충선왕은 원나라 왕실의 후한 대접을 잃게 될까 봐 귀국하지 않았다. 당시 충선왕은 원 무종의 신임을 받아 심양왕에 봉해져 있었으며 심지어는 무종이 심양의 관리들에게 충선왕을 거치지 않은 청원이나 보고는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따라서 충선왕은 이같은 절대적인 힘과 배경을 포기할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세자 왕감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충선왕은 세자와 그의 측근들을 죽이면서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였고 이로 인해 엄청난 물자가 매일같이 연경으로 이송되어야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의 압박이 날로 거세지자 1313년 3월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극단적 조치를 내고 신하들의 환국압력을 피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때 충선왕이 이복형 강양공 왕자의 둘째 아들 왕고를 세자로 세우는 바람에 후에 충숙왕과 왕고간에 치열한 왕위 다툼을 유발시킨다. 이렇듯 원 왕실이 부여한 지위를 누리기 위해 원나라 체류를 고집하던 충선왕은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을 세워 그 곳에서 당대 명류들과 학문을 교류하기도 했고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내 그들과 교류하게하여 고려학문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316년에는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 왕고 에게 물려주고 티베트 승려를 불러 계율을 받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이처럼 무종, 인종 대를 거치면서 원 왕실의 후한 대접을 받으며 호화로운 생활과 권력을 동시에 누렸다. 하지만 1320년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자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했고 결국 원 왕실로부터 심한 환국 압력을 받아야만 했다. 거기다 고려 출신인 환관의 모략에 말려들어 토변으로 유배되고 1323년에 태정제가 즉위하여 겨우 풀려나 연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1325년 5월 중국 연경에서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하였다.
정비왕씨 - 1287년 그녀는 원 왕실의 요구에 따라 공녀로 바쳐질 운명에 처했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로 가던 충선왕이 장차 자신이 그녀에게 장가들려고 한다고 말하여 그녀를 공녀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1289년 충선왕과 결혼하여 세자빈이 되었다. 하지만 이 결혼이 동성혼 이라는 이유 때문에 원 세조의 많은 비판을 받았고 원은 고려왕실과 몽고 공주와의 결혼을 관례로 정착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동성혼을 금지시키고 1308년에 충선왕은 동성혼을 법으로 금지시키고 왕실과 통혼 할 수있는 대상으로 15개 귀족 가문을 선정하게 되었다.
■ 제27대 충숙왕 1294년-1339년. 재위기간 1313년 -1330년 .1332년 2월복위 - 1339년 2월. 24년
● 충숙왕의 위태로운 삶과 불안전한 왕위
충선왕은 왕위를 충숙왕 에게 물려주면서 동시에 조카 왕고를 세자로 세웠다. 이같은 충선왕의 이해 못할 행동은 고려조정을 왕위 쟁탈전의 소용돌이로 휘몰아 간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누차에 걸쳐 원나라에 소환 당하는 수모를 겪다가 급기야 왕위를 내놓아야 하는 위기 상황에 몰린다. 1313년 3월 원나라의 심양왕 직을 고수하던 충선왕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다. 이때 그의 나이는 20세였다. 충숙왕은 충선왕이 즉위전부터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어린시절을 거의 원나라에서 보냈다. 충숙왕 에게는 감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고 1310년 조정대신들이 충선왕의 환국을 청원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자 몇몇 조신들이 세자 왕감을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려 하자 이미 충렬왕과 부자간의 세력다툼을 벌여본바 있는 충선왕은 세자 왕감과 그 주변 인물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충숙왕은 냉혹한 정치적 결단의 희생자가 된 동복형 왕감을 대신하여 고려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충선왕은 이복형 왕자의 아들인 조카 왕고를 총애하여 그를 세자에 세우니 왕고는 지속적으로 왕위찬탈의 음모를 꾸며 충숙왕을 곤경에 빠트리곤 한다. 원나라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1315년 원나라의 강요로 귀족과 천민들의 옷 색깔을 다르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1316년에는 상왕인 충선왕이 자신의 심양왕 자리를 조카이자 세자인 왕고에게 넘겨줌에 따라 왕위를 위협받게 된다. 심양왕에 오른 왕고는 원 왕실의 신뢰를 얻게 되자 그 힘을 바탕으로 고려 국왕의 자리를 넘보게 되고 충숙왕은 왕고의 형인 왕유를 단양부원대군으로 동생인 왕훈을 연덕부원대군으로 봉하여 심양왕 왕고 에게 화합의 손길을 내밀었다. 1316년 7월 충숙왕은 원나라 영왕의 딸 복국장공주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된다. 하지만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온지 3년만 인 1319년 9월 의문의 죽음을 남기고 죽는다. 이 당시 제주도에서 민란이 일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고 충숙왕은 덕비홍씨를 잊지 못하고 자주미행을 나갔으며 정사를 뒷전으로 하고 사냥과 주색을 즐기고 있었다. 또한 미행을 나갔다가 백성을 만나면 구타하는 일이 잦았고 왕의 폭력적인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주의 부고가 원나라에 전해지자 사인규명을 위해 선사 이상지를 개경으로 보내 수사하게 하였다. 공주의 궁녀와 요리사 한복만을 가두고 심문을 하자 1328년 8월 왕이 연경궁에서 덕비홍씨와 노는 것을 목격한 공주가 질투를 하다가 왕에게 얻어맞아 코피가 난 일과 그 다음날에 다시 유련사에서 왕으로부터 심하게 구타당한 일을 실토한다. 이렇게 되자 원의 이상지는 궁녀1명과 요리사 한복만을 원나라로 압송해갔고 충숙왕은 중서성에 공문을 보내 한복만이 거짓진술을 하였다고 변명하였다. 이 사건 이후 충숙왕은 원 왕실의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1320년 원에서는 영종이 새롭게 즉위 하였고 심양왕 왕고는 영종의 신임을 받으며 충숙왕을 강하게 비토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충숙왕은 밤마다 연회를 열고 술에 젖어 살았으며 국고가 탕진되자 내서사인 안균을 경상도에 파견하여 돈을 거두게 하여 향락생활을 지속하자 대신들의 불만이 심화 되었고 왕은 상소를 올린 대신들을 마구 구타하여 조정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같은 충숙왕의 행태는 왕고를 통하여 원 왕실에 보고되었고 1321년 3월 원나라 입조명령을 받아 충숙왕은 왕유에게 서무를 대리하게하고 연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약 3년 동안 원나라에 붙잡혀 있으면서 왕위를 노리고있던 왕고의 협박을 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 당시 충선왕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영종의 명령을 거부 했다는 이유로 유배된 상태였고 충숙왕은 거의 폐위된 상황 이었다. 왕고파인 유청신, 오잠 등은 원나라 도성에 서면을 보내 고려 국호를 폐하고 고려를 원에 편입시켜 성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원 왕실은 이같은 터무니없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의 영종이 죽고 태정제 진종이 왕위에 오르게되자 상황은 급변한다. 태정제는 유배중이던 충선왕을 다시 호경으로 불러 들이고 충숙왕을 풀어준다. 그래서 3년 가까이 왕위를 상실한 체 호경에 머물고있던 충숙왕은 1324년 2월에 개경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왕고의 왕위찬탈 위협이 계속되자 충숙왕은 원의 지원을 받기위해 다시금 원나라 위왕 아가목의 딸 금동공주(조국장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충선왕도 충숙왕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해 태정제에게 충숙왕의 무고함을 간언한다. 하지만 이듬해 조국장공주가 용산원자를 낳고 산고로 인해 18세의 어린 나이로 횡사한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다시 궁지에 몰린다. 충숙왕의 입지가 약해진 틈을 타 왕고의 왕위 찬탈음모가 다시 진행되고 왕고파인 유청신과 오잠이 원나라 중서성에 가서 충숙왕은 눈이 멀고 귀먹은 벙어리라 친히 정사를 돌볼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충숙왕은 왕자 정을 세자로 책봉하여 원에 입조케 하였다. 충숙왕을 접한 원 매려는 유청신과 오잠이 거짓말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한편 왕고가 심양왕직에 있기 때문에 고려 세자를 겸할 수 없다는 충숙왕의 설명을 듣고 모든것이 왕고파의 무고라는 사실도 알게된다. 이 일로 입지가 강화된 충숙왕은 왕고의 도당인 조신, 김온, 권하, 전굉 등을 순군옥에 가두어 귀양 보내는 등 왕권강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몸이 약해져 1330년 2월 세자 정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앉아 있다가 그해 7월 원나라에 가서 머물렀다. 하지만 충혜왕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음탕한 것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자 1332년 2월 복위 하였다. 복위한 충숙왕은 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민상정과 조염휘를 파견하여 정승 윤석을 비롯한 수십명에 대하여 왕을 잘못받든 죄로 삭직하고 유배 시켰다. 그리고 몽고여자 경화공주를 데리고 귀국하였다. 원나라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하는 세공을 삭감케하고 공녀와 환관의 징발을 중지 하도록 청원하는등 몇가지 업적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대인 기피증이 심해져 신하들을 멀리하고 정사를 돌보지않았다. 그리고 복위 8년 만인 1339년 지병이 악화되어 46세를 일기로생을 마감하였다.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 사이에 충혜왕과 공민왕을 낳았다.
● 공원왕후 홍씨는 공민왕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반대하고 공민왕에게 누차에 걸쳐 신돈과 어울리지 말것을 당부했다. 이 때문에 신돈과 대립하였고 신돈을 통해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공민왕도 그녀를 피하였다. 공민왕이 아들 우를 세자로 삼으려 하자 우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강력히 반대하고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소비하는 큰 공사는 제왕으로써 할바가 아니라고 반대하고 나섰다. 우왕과도 곧잘 마찰을 일으키다가 1380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
● 숙공휘령공주 ?-1344년 원나라 귀족출신으로 추측 1339년 충숙왕이 죽은후 에 충혜왕은 영안궁에서 수차례에 걸쳐 연회를 베풀고 그녀를 초대 하였다. 술좌석이 끝나고 충혜왕은 술에 취한 척하고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그녀를 강간하였다. 이튿날 공주는 이일 이 수치스러워 원나라에 돌아가려고 말을 구하려고 했으나 충혜왕이 개성의 말 시장을 못 열게 하였고 그 후 그녀는 1343년 원나라 사신 두린 등이 와서 공주에게 어주를 전달하자, 공주가 전의 일을 고하고 두린은 대경타적과 낭중별실가 를 시켜 충혜왕을 붙잡아 갔다. 소생은 없었다.
■ 제28대 충혜왕 1315년-1344년.재위기간 1330년-1332년. 1339년복위-1344년. 6년간 16세에 즉위.
● 희대의 패륜아 충혜왕과 고려 왕실의 위기
1330년 2월 병약해져 정치에 염증을 느낀 충숙왕의 양위를 받아 16세에 왕에 올랐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한나라를 통치할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격마져 포악하여 정사를 뒷전으로 미루고 향락과 여색에 젖어 지냈다. 즉위 후 6일동안 정사를 페하고 사냥을 즐기는가 하면 날마다 내시들과 씨름을 하며 놀았다. 또한 배전, 주주 등에게 국가의 정책을 일임하여 일부 관료들의 권력 남용이 극대화되고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사관들을 몹시 싫어하여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같은 폐정이 2년 동안 지속되자 원 왕실은 충혜왕을 연경으로 소환하여 근신명령을 내리고 충숙왕을 복위 시켰다. 하지만 연경에서 충혜왕의 행실이 고쳐지지 않자 1336년 12월 고려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1339년 3월 충숙왕이 죽자 충혜왕은 복위 하였다.충혜왕은 닥치는 대로 음탕한 짓들을 일삼기 시작했는데 1339년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권씨를 강간하였고 8월에도 역시 부왕의 후비인 숙공휘령공주를 강간하였다. 이처럼 자신의 서모까지도 서슴없이 강간하던 충혜왕 이었기에 일반 민가의 아녀자들에 대한 이 같은 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 가운데 원나라 조정은 그 해11월 중서성 단사관 두린과 직성사인 구통을 개경에 파견하여 충혜왕 에게 국새를 내려 복위를 인정하였다. 이들은 숙공휘령 공주를 찾아 원나라 왕이 보낸 술을 건넷는데 이때 공주는 충혜왕이 자신을 강간한 사실을 고하였다. 그러자 두린 일행은 수하들을 시켜 충혜왕을 비롯한 홍빈, 조운경 등을 포박하여 연경으로 압송하였다. 원나라로 압송 당한 충혜왕은 1340년 3월 형부에 갇혔고 김인, 김륜, 홍빈등도 함께 갇혀 심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충혜왕은 탈탈대부의 도움으로 풀려나 4월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무렵 원나라에서는 고려출신 여자 기씨를 순제의 제2왕후로 삼았는데 그녀가 바로 기황후로 기철의 누이 동생이었다. 충혜왕의 음행은「고려사」에 기록된 강간 사건만 수없이 기록되고 있는데 기록되지 않는일을 합한다면 충혜왕의 음행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1343년 3월 어느날 밤에는 민천사 누각에 올라 비둘기를 잡으려다 횃불이 옮겨붙어 누각을 불태운 일이 있었고 연회장을 만들기 위해 민가 백여채 를 헐고 토지와 재산을 강탈 하기도 하였다. 충혜왕의 이같은 학정이 계속되자 기철 등은 원나라 조정에 고하여 충혜왕의 폐정이 극에 달했다며 그를 소환하여 폐위 시킬것을 건의 하였다. 충혜왕의 악행을 보고받은 원나라 조정은 협의 끝에 그를 소환하기로 결정하고 대경 타적과 낭중 별실가 등 6명을 보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할 것 과 대사령을 반포하는 원나라 순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다는 핑계를 댓고 충혜왕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정동성으로 갔다. 이때 타적이 발로 왕을 걷어차 포박하여 원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왕과 함께 있던 백관들은 대부분 도주 하였다. 원으로 압송된 충혜왕은 원나라 조정의 결정에 따라 게양현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유배에 앞서 내려진 원 순제의 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써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 먹는것이 너무 신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로 온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 고 하였다. 충혜왕은 유배가던 중 악양현에서 1344년 정월 30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독살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에 백성들은 아무도 슬퍼하는 사람이 없었다.
■ 제29대 충목왕 1337년-1348년. 재위기간 1344년 - 1348년. 4년간. 즉위 7세-12세.
● 어린 충목왕의 즉위와 덕령공주의 섭정
1344년 2월 고룡보가 여덟살 먹은 세자 흔을 안고 원나라 순제를 찿아 갔더니 순제가 흔에게 물었다. "너는 아비를 본받으려고 하느냐 ? 아니면 어미를 본 받으려 하느냐 ? " 이에 흔이 어미를 본받겠다고 말하자 순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교지를 내려 그를 고려 제29대 왕으로 책봉했다. 그리고 그의 모후 덕령공주가 섭정을 시작했다. 충목왕은 서연에서 우정승 채하중을 비롯한 수십명의 신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정치와 예의를 익혔다. 1347년 정월에는 쌍성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의 숫자를 파악하게 하고 또한 각도에 파견하여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덕령공주가 국가 기강을 바로 잡으며 경제 재건에 힘쓰고 있는 동 충목왕은 급속도로 병약해져 1348년 8월에는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덕녕공주는 충목왕의 거쳐를 건성사로 옮겨 요양토록 하고 자신은 밀직부사 안목의 집에 거쳐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정사를 처결하였다. 충목왕은 모후 덕령공주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 제30대 충정왕 1338년-1352년. 재위기간 1349년-1351년. 2년간. 12세-15세.
● 충정왕의 짧은 통치와 비참한 최후
충목왕이 죽자 고려조정 내에서는 왕자 저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노정, 손수관, 이군해 등이 그를 데리고 연경으로 떠나려 하자 전법관들이 회의를 소집하여 그들을 저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사신의 힘에 밀린 전법관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연경에 도착한 왕자 저는 그해 5월 순제로부터 왕에 책봉되어 7월에 왕위에 올랐다. 이 때부터 덕령공주와 충정왕의 모후 윤씨 사이에 치열한 세력다툼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세력다툼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1350년부터 경상도 일원을 중심으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왜구의 만행이 진행되자, 민심은 흉흉하였고 관리들은 출전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고 오히려 왜구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마당이었기 때문에 고려 조정은 속수 무책이었다. 이렇게 전국이 왜구로 인해 뒤숭숭한 가운데 원나라 순제는 고려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세웠다. 충정왕은 강화도에 유배되고 몇 개월을 그곳에서 지내다가 이듬해 3월 공민왕에 의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독살되었다.
● 왜구 [倭寇] 13∼16세기에 걸쳐 한국과 중국의 연안에 수시로 침입하여 인명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던 일본의 해적집단.
■ 제31대 공민왕 1330년-1374년 . 재위기간 1351년 1374년 22년간. 22세즉위.
● 개혁주의자 공민왕의 배원 정책과 고려의 국권회복
14세기 중엽에 접어들면서 원은 홍건적의 봉기로 급격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즉위한 공민왕은 배원 정책을 골격으로 하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통하여 국권을 되찾고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려 한다. 이로써 고려는 1백여 년간 지속된 원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체제 구축을 위해 매진하게 된다.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몽고 풍속을 없애고 친원세력을 제거하는 동시에 일곱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관제 개혁을 실시하여 문종시대에 완성된 관제를 복구 하였다. 정방을 폐지하고 개혁교서를 발표하여 토지와 노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명령하고 1366년 신돈의 주도로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귀족들이 불법으로 겸병한 토지를 원 소유주자 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해방시키게 된다. 공민왕은 1352년 8월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기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그렇게 할때다. 참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 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번씩 계를 올리도록 하라" 이러한 명령은 왕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공민왕의 강한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판삼사사 조일신이 정변을 일으켜 공민왕을 협박하여 자신을 우정승에 임명케 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배치 하였다. 이후 공민왕은 조일신을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한다. 그리고 이제현을 우정승에 조익청을 좌정승으로 임명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게 된다. 1352년 변발과 호복 등의 몽고 풍속을 금지 시켰으며 1356년 에는 원의 연호를 폐지하고 관제를 문종대의 제도에 맞춰 복구 하였다. 정동행성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기철을 숙청했으며 이자춘의 내조에 힘입어 원나라 복속이후 일백년간 존속해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고 원나라에 빼앗겼던 서북면 및 동북면 일대의 영토를 회복하기 시작한다. 승려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승직에 관한모든 권한을 대행토록 하는등 불교의 중흥을 도모하기도 한다. 1356년 7월 고종말년에 원나라에 빼앗겼던 함주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홍건적의 침입으로 다시 친원 정책으로 돌아서고 1355년 홍건적은 국호를 송이라 하고 고려를 침범한다. 1361년에 다시 대대적인 2차 침입을 감행한다.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고 개경의 궁성이 완전히 전소되고 각도의 문화재와 사찰이 불타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되자 반원정책을 포기하고 1361년 정동행성을 다시 설치 하였다. 1363년 찬성사 김용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공민왕은 안도적의 희생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고 반란은 최영과 오인택 등에 의해 제압된다. 1356년 2월 노국공주가 산고끝에 죽음을 맞이하자 공민왕은 절망에 사로 잡히게 되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왕사 신돈 에게 정권을 내맡겨 조신들을 견제토록 한 후 공주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전념 하였다. 신돈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하기에 이르자 공민왕은 신돈이 부담스러웠고 이를 눈치 챈 선부의장 이인이 1371년 7월 신돈을 역모로 고변하자 공민왕은 신돈을 수원으로 유배 시킨 후 처형 했다.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은 즉위 초의 개혁적인 성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자주 술에 취해 있거나 노국공주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미행을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이때부터 공민왕은 변태적인 행동을 자주하였다. 관음증에 빠지기도 하고 자제위를 두고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고, 후계자가 없음을 염려하여 홍륜, 한안등을 시켜 왕비를 강간토록 하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기면 자기 자식으로 삼으려 하였다. 1374년 9월에 그는 내시 최만생 으로부터 익비가 아이를 잉태 했다는 보고를 받고 익비의 몸속에 있는 아이를 완전히 자기 자식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최만생에게 왕비와 같이 잔 홍륜과 그 무리를 죽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일을 안 최만생도 죽이려 하자 최만생은 홍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그들은 침전에 침입하여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 있는 공민왕을 죽인다. 최만생과 홍륜 일당은 그 다음날 모두 체포되어 죽거나 유배됐다. 익비 한씨는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될 때 조민수는 그녀에게 국새를 맡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계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이성계등이 창왕을 폐하자 이성계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라는 교서를 내렸다. 정비 안씨는 우왕, 창왕, 공양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 옹립 교서를 내리게 된다.
● 기철의 역모사건
그의 막내 여동생이 원나라에 공녀로 바쳐져 궁녀로 입궁 하였는데 순제의 눈에 들어 제2왕후의 자리에 올라 태자를 낳자 기씨 형제들은 그녀의 힘에 의지하여 원과 고려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기철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고려 조정은 기철을 정승에 임명하여 덕성부원군에 봉하고 기원은 덕양군에 봉했다. 기씨 형제와 왕실간에 다툼이 자주 일어났고 기씨 세력의 힘이 너무 강대하여 왕도 어찌하지 못했다. 즉위 초부터 개혁과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던 공민왕은 조일신의 정난 이후에 더욱 강하게 반원정책을 실시했고 이는 곧 친원세력인 기씨 일파의 숙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불안을 느낀 기철은 권겸, 노정 등과 모의 하여 공민왕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기철의 반란계획을 눈치챈 공민왕이 1356년 3월에 이자춘을 불러 쌍성의 유민들을 동요하지 않도록 부탁한 다음 남양후 홍인박으로 하여금 기철, 권겸, 노책 등을 체포하여 처단함으로써 기철 일파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이어 곧 공민왕은 정동행성중서성이문소를 철폐하고 쌍성을 수복하여 서북면과 동북면 일대의 옛 영토를 회복 하였다.
● 공민왕의 개혁작업을 수행한 사람들
● 현실주의적 개혁론자 이제현 1287년 1367년. 81세사망
이제현은 충렬,충성,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왕 시대를 모두 거치면서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번도 유배된 적이 없는 대단한 정치가이다. 고려에 최초로 성리학을 들여온 백이정 에게 배우고 권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부자를 길러 낸 대학자이다. 이제현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사리사욕에 연연하지 않은 대범하고 절도 있는 인물이었고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현실적이면서도 지조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었다. 1353년 사직했다가 이듬해 우정승에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그 후 사직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1362년 홍건적의 침입 때 왕을 청주로 호종, 계림부원군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조맹부의 서체를 도입하여 유행시켰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 경주의 귀강서원과 금천의 도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효행록》《익재집》《역옹패설》《익재난고》등이 있다.
● 급진 개혁론자에서 불청객으로 전락한 신돈 [辛旽, ?~1371] 고려말의 승려.
본관 영산(靈山). 속성 신(辛). 자 요공, 법명 편조(遍照), 돈(旽)은 퇴속하여 고친 이름. 호 청한거사. 계성현 옥천사 사비의 아들.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사부로서 국정을 맡았다. 1365(공민왕 14) 진평후라는 봉작까지 받아 가며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는데, 그의 개혁정치는 고려 내부의 혼탁한 사회적 적폐를 타개,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것으로, 전민변정도감이라는 토지 개혁 관청을 두어 부호들이 권세로 빼앗은 토지를 각 소유자에게 돌려주고, 노비로서 자유민이 되려는 자들을 해방시켰으며, 국가 재정을 잘 관리하여 민심을 얻었다. 이에 따라 노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성인이 나타났다며" 찬양했고 반면에 노비와 토지를 잃은 양반들은 "중놈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 하였다. 신돈은 인사권을 비롯한 내외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후 강력한 개혁작업을 추진하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것은 노비제도와 토지개혁이었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상층계급의 반감을 샀고, 왕의 신임을 기화로 점차 오만해져서 방탕과 음란을 일삼았으므로 점점 배척을 당하게 되었다. 영록대부집현전대학사가 되어 1369년(공민왕 18년) 風水地理說 로 왕을 유혹, 서울을 忠州 로 옮길 계획을 세우고 스스로 오도도사심관 이 되려다 왕의 불신을 받았다. 그러자 왕을 살해하려는 역모를 꾸며 권력을 되찾으려 하였으나 발각되어 수원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에 처형되었다.
■ 제32대 우왕 1365년-1389년. 재위기간 1374년 1388년. 재위13년간. 10세에 즉위.
1374년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등에 의해서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 등은 우를 고려 제32대 왕으로 옹립하는데 이때 우왕의 나이는 겨우 10세였다.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당하던 달인 1374년 9월 이미 사망하고 없던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다음 한씨의3대 조상과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또한 우왕 즉위후 에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 2년에 자신이 왕의 친모라고 주장하다가 이인임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만다. 공민왕이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말한 것은 반야가 신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공신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다.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 홍씨도 우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 하고 우를 왕으로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1378년에는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목사 김사혁을 패주시키고 공주를 점령한 사건이 발생하자 고려 조정은 왜구 소탕 작전에 나서서 1376년 에는 최영이 논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등이 화약과 화포로 적선 5백여 척을 불사른다. 또한 이해에 황산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하고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 에서 수백척의 적선을 궤멸시킨다. 1388년 명나라에서는 일방적으로 철령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귀속 시키겠다고 통보해왔다. 철령이북이 원나라에 속해 있으니 당연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조정은 회의를 거듭 하게 되고 결국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한다. 한편으론 밀직제학 박의종을 시켜 철령이북 지역은 옛부터 고려영토였다는 편지를 명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명나라에서는 왕득명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고려 조정에 보내 왔다. 이에 우왕은 요동정벌을 위해 요동진 공격 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서 군사를 징집 하였다. 그리고 그 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 명령을 내렸다. 그 해 5월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 군사와 함께 압록강의 위화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불어난 물 때문에 진군을 못하고 있었고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우왕에게 회군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와 협의하여 군사를 돌려 회군을 단행한다. 회군에 성공한 이들은 최영과 그의 측근들은 체포 되어 유배지로 떠났으며 우왕도 폐위 되서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1389년 11월 강릉으로 이배 되었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능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실록도 편찬되지 않았다.
● 최영의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
● 최영의 요동 정벌 - 1388년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 오면서 고려와 명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요동부의 관리를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려 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주청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하였다. 최영의 요동정벌론을 받아들인 우왕은 전국5도의 각 성에 성을 수축할 것을 명령하고 군사를 서북방면에 집중배치 하여 명나라의 급습에 대비하였다. 한편 개경의 방비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중흥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전쟁상황에서 왕족을 중흥성에 이주시키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무렵 우왕은 자신의 신변안정을 위해 최영의 딸을 영비로 삼았다. 최영은 전쟁준비를 하면서 요동정벌에 강하게 반대했던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죽여 버렸다. 그 무렵 명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이에 우왕은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명령하여 개경을 지키게 하고 요동진격을 준비하였다. 그러자 이성계는 요동공략에 반대하며 ‘사대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계획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왕은 출병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성계는 군대를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가 가을에 출병 하는게 좋겠다고 주장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 요동정벌에 출병한 병력수는 좌우군을 합쳐 총5천여 명, 동원된 말은 21682필이었으나 적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해 10만 병력이라고 말했다.
●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 1388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회군한 사건. 왜구의 토벌이 한창 진행되던 우왕 말년에, 고려와 명 나라 사이에 영토 싸움이 일어났다. 명은 원의 쌍성 총관부 관할하에 있던 땅을 그들의 직속령으로 만들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이에, 고려의 조정은 크게 분개하여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요동정벌을 둘러싸고 조정의 의견이 갈라졌다. 최영을 중심으로 하는 쪽은 싸움에 나가라고 주장 하였고,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쪽은 국내외의 상황으로 보아 요동 정벌은 실제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반대하였다. (철령위 문제)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정벌군이 파견되었다. 고려에서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아 평양에 나아가 독전하게 하고 조민수를 좌군도 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고 출정하게 하였다. 처음부터 요동정벌론에 반대한 이성계는 정벌군이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자 진군을 멈추고,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첫째 요동까지는 많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장마철이라 군량 운반이 곤란하며, 둘째 모든 군사가 싸우러 나간 틈을 타서 왜구가 공격해 올 것이고, 셋째 지금은 덥고 비가 오는 때라서 활을 붙인 풀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모두 병에 걸릴 것이고 넷째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나라를 보호하는 길이니 요동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상서로써 회군을 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던 최영과 우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이성계는 5월 20일 회군을 결행하여 군대를 국내로 돌이켰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정벌군과 싸우려 하였으나, 얼마 뒤 최영은 이성계에게 붙잡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우왕도 강화도로 쫒겨났다. 이를 계기로 이성계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한 손에 잡아 조선창업의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 제33대 창왕 1380년-1389년 . 제위기간 1388년 - 1389년. 재위 1년간 . 9세에 즉위.
● 어린 창왕의 짧은 치세와 신진세력의 득세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세력이 축출되고 우왕이 폐위되자 조정은 회군세력에 의해 장악된다. 차기왕을 세우는 문제로 이성계일파는 종친들 중에 한 사람을 택하여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는데반해 조민수 일파는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이에 조민수는 당시 명망이 높던 이색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이색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로 하여금 창을 왕으로 세울것을 명령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였다. 이에 이색과 조민수가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이성계는 병을 핑게로 사직을 청원 하였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 협의하여 개혁을 단행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는데 많은 신진 관료들이 이에 찬성하고 있었다. 개혁을 주도하던 조준은 관제, 신분, 국방 등 국정전반에 대한 혁신을 주장하고 그 내용들을 이성계, 정도전 등과 협의하여 1388년 7월에 토지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전제개혁소를 올렸다. 이때 조민수는 이들의 개혁안에 대해 지나치게 거부 반응을 보이다가 이인임과 친척관계로 한때 부정한 짓을 하였다는 조준의 탄핵을 받아 그 해 8월 창녕으로 유배 되었다. 조민수의 유배는 문하시중으로 있던 이색에게는 큰 타격이었지만 이성계파의 전제개혁에 대한 주장을 억제하며 가까스로 정권을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이성계파로 기울었고 이에 이색은 명나라 힘을 이용할 요량으로 창왕의 명나라 입조를 추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향리 장단으로 가서 머물렀다. 창왕이 사람을 보내 여러번에 걸쳐 조정으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이색은 등정하지 않았다. 1389년 11월 우왕의 복위 사간으로 반 이성계파가 대거 축출되자 곧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보내졌고 그 다음 달인 12월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이 즉위하자 왕명을 받은 대제학 유구에 의해 창왕은 죽음을 맞이한다. 우왕과 창왕과 마찬가지로 신돈의 후손이라 하여 실록이 편찬되지 않았다.
■ 제34대 공양왕 1345년 -1394년 . 재위기간 1389년 - 1392년 . 재위 2년간. 45세 즉위.
● 고려의 마자막왕 공민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의 복위 사간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 진입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남은, 조준, 정도전등 급진 신진세력은 유교적 왕도 정치를 꿈꾸었고 역성혁명을 강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건파인 정몽주, 이숭인 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유지 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 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역성혁명을 꿈꾸는 남은 등을 경계하며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하지 못하자 4월에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의 급진파를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이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돌아와야 했고 이방원은 이들 온건 개혁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조영규 등의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살해한다. 이성계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6월에 남은과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중책에 앉혔다.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 하면서 역성혁명은 구체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 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이들은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이성계는 고려 국왕에 오른다. 그리고 이듬해 2월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개국한지 474년만에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 영일. 자 달가. 호 포은. 초명 몽란. 시호 문충. 영천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수찬 위위시승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예조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등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으로 이인임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진현관제학·예의판서·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가 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에 책록되었다. 1389년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 벽상삼한삼중대광·수문하시중·도평의사사병조상 서시판사·경영전영사·우문관대제학·익양군충의백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을 참작, 《신율》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 충절의 대명사 두문동 칠십이현 [杜門洞七十二賢]
조선의 개창에 반대해 두문동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72명의 고려 유신을 이르는 말. 72명의 이름은 현재 모두 밝혀지지는 않았고, 신규 ·신혼 ·신우 ·조의생 ·임선미 ·이경·맹호성 ·고천상 ·서중보 성사제 ·박문수·민안부 · 김충한 ·이의 등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있던 옛 지명으로, 칠십이현이 모두 이곳에 들어와 마을의 동 ·서쪽에 모두 문을 세우고는 빚장을 걸어놓고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후세에 절의의 표상으로 숭앙되었고, 1783년에는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 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하였다.
● 정도전 [鄭道傳, 1337~1398]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학자.
본관 奉化. 자 宗之. 호 三峰. 1362년 진사, 이듬해 忠州司錄을 거쳐 典敎寺主簿)·通禮門 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 成均司藝 · 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李仁任· 慶復興 등의 親元排明 정책을 반대하다 會津縣에 유배되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 李成桂의 막료가 되었고 이듬 해 성절사 鄭夢周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남양부사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成均大司成 에 승진하였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밀직부사로 승진하였고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에 책록되었다. 1390년 경연지사로 성절사 겸 변무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삼사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조민수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으로 재직 중,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 나와 조준·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 예문춘추관사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을 신설했다. 제l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참수되었다. 유학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 《삼봉집》 《經濟六典》 《經濟文鑑》 《心氣理篇)》 《佛氏雜辨》《心問天答》《陳法書》 《錦南雜題》 등이 있고, 작품에 〈(納氏歌)〉 〈靖東方曲〉 〈문덕곡〉 〈新都歌〉 등이 있다.
■ 태혜정광 경성목 현덕정문 순선헌 숙예인의 명신희 강고원충 선숙혜 목정공우 창공양
▣ 조선왕조 실록 요점정리 ▣
● 고조선건국: 기원전 2333년-기원전108년 고조선 멸망
● 신라건국 : B.C 57년 박혁거세-935년 경순왕이 스스로 왕건에 투항. 56대 992년.
● 고구려 : B.C 37년-668년. 주몽「동명성왕」이 졸본부여 에서 즉위.- 28대 705년.
「신라 문무왕 때 라.당 연합군에 의해」멸망. 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세 아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나라의 형편이기울기 시작했다. 668년[28대 보장 왕]. 당나라 군대 50만 신라 군대27만이 공격하여 멸망함.
● 백 제 : B.C 18년.-660년. 31대 678년.「온조왕 이 건국」-고구려 주몽의 셋째 아들. 백제 의자왕 20년. 신라의 김유신 등이 계백장군 등을 물리치고 완산주 정복
● 가락국 : 42년-532년 신라에 합병
● 대가야 : 42-562년
● 발 해 : 698-926년 대조영이 건국 926년 멸망. 15대 인선 왕 때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
● 후백제 : 892년-936년. 견훤이 완산주에 도읍을 정함.
▣ 「궁예-857년-918년」.
● 후고구려 : 901년-918년. 궁에가 904년 국호를 마진 도읍을 철원으로
▣ 「견훤-867년-936년」.
● 고려건국 : 918년-1392년. 왕건이 건국 1392년 공양왕 때 멸망.
▣ 「왕건 877년-943년」.
● 후삼국 통일 : 936년.
● 조선 1392년-1910년. 이성계 건국. 27대 순종 때 한일 합방으로
집권기간 |
즉위 |
사망 |
집권기간 |
즉위 |
사망 | ||
제1대왕 태조 |
6년 |
1392-1398 |
57세-74세 |
제15대왕 광해군 |
15년 |
1608-1623 |
34세-67세 |
제2대왕 정종 |
2년 |
1398-1400 |
41세-63세 |
제16대왕 인조 |
26년 |
1623-1649 |
29세-55세 |
제3대왕 태종 |
18년 |
1400-1418 |
33세-51세 |
제17대왕 효종 |
10년 |
1649-1659 |
31세-41세 |
제4대왕 세종 |
32년 |
1418-1450 |
21세-54세 |
제18대왕 현종 |
15년 |
1659-1674 |
19세-34세 |
제5대왕 문종 |
2년 |
1450-1452 |
36세-38세 |
제19대왕 숙종 |
46년 |
1674-1720 |
14세-60세 |
제6대왕 단종 |
3년 |
1452-1455 |
12세-17세 |
제20대왕 경종 |
4년 |
1720-1724 |
32세-37세 |
제7대왕 세조 |
13년 |
1455-1468 |
39세-52세 |
제21대왕 영조 |
52년 |
1724-1776 |
31세-83세 |
제8대왕 예종 |
1년 |
1468-1469 |
19세-20세 |
제22대왕 정조 |
24년 |
1776-1800 |
25세-49세 |
제9대왕 성종 |
25년 |
1469-1494 |
12세-38세 |
제23대왕 순조 |
34년 |
1800-1834 |
12세-45세 |
제10대왕 연산군 |
12년 |
1494-1506 |
19세-31세 |
제24대왕 헌종 |
15년 |
1834-1849 |
8세-23세 |
제11대왕 중종 |
38년 |
1506-1544 |
19세-57세 |
제25대왕 철종 |
14년 |
1849-1863 |
19세-33세 |
제12대왕 인종 |
1년 |
1544-1545 |
30세-31세 |
제26대왕 고종 |
44년 |
1863-1907 |
12세-56세 |
제13대왕 명종 |
22년 |
1545-1567 |
12세-44세 |
제27대왕 순종 |
3년 |
1907-1926 |
33세-53세 |
제14대왕 선조 |
41년 |
1567-1608 |
16세-59세 |
● 조선의 건국과 근세 사회의 성립
위화도 회군
공민왕의 개혁실패와 사회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고 권문세족의 전횡으로 정치 기강의 문란과 백성들의 생활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북으로부터 홍건적, 남으로는 왜구가 침입하여 고려는 내외의 우환에 시달렸다. 홍건적은 원 말기 한족 농민 반란군으로 각처에 독립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의 일부가 고려에 침입해 왔다. 두 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까지는 함락되기는 했지만 이방실, 이승경, 정세운, 이성계 등의 활약으로 큰 피해 없이 물리칠 수 있었다. 더욱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왜구의 침입이었다. 그들은 조운제도를 무력화 시키는 등 전국의 해안 지방을 침탈해 황폐하게 했다. 점차 고려의 토벌 작전이 효과를 거두고 창왕 때 박위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면서 다소 완화되는 양상을 보였지만 조선초까지도 계속되었다. 특히 왜구를 토벌하는 장수들은 국왕보다도 더 많은 국민의 신망을 받는 존재로 부각되었다. 홍산 전투의 최영과 황산전투의 이성계는 왜구의 토벌 과정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대표적 인물이었다. 공민왕과 우왕 때에는 최영과 이성계가 대표적 권문세족이었던 이인임 일파를 축출할 때까지는 같은 길을 걸었으나 이후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최영은 이성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명문출신인 데다가 그 자신이 우왕의 장인이었으므로 당시의 집권층인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최영은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는 격언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사회적 위치는 우왕의 장인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본래 영흥출신의 변방 무사였으나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 시 내부에서 호응하는 공을 세워 처음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이후 원의 침입 격퇴, 요동공략,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과정을 거치면서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 자신이 신흥 무인이라는 점에서 출신 성분이 비슷한 신진 사대부들과 결합하여 개혁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불안한 동거 상태를 유지하던 최영과 이성계의 정면 충돌은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에 대한 대응책 차이가 계기가 되었다. 원을 대신해 중국을 차지한 명은 원의 영토였던 철령 이북의 땅 즉 옛 쌍성총관부 관할 지역이 원을 대신하는 명의 영토라는 논리로 이 지역을 명의 직속령으로 삼을 것과 그 통치를 위한 관청인 철령위를 설치할 것을 통보해오자 친원적 성격의 권문세족을 대표하던 최영은 이를 불쾌히 여겨 요동정벌을 추진한다. 그러나 당시 신진사대부는 명과의 친선을 도모하는 외교 노선을 채택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의 사상기반인 성리학에서의 명분론에 따라 한족 국가인 명의 정통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 현실적으로 권문세족과 연결된 원을 배척해야 한다는 점 등이 친명 외교를 표방했던 것이다. 이에 이성계는 이른바 4대불가론 즉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이 좋지 않고 둘째 더운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좋지 않으며 셋째 왜구가 이 틈을 노려 쳐들어 올 염려가 있고 넷째 장마가 들면 활이 풀리고 질병이 퍼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아직은 권문세족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최영의 주장대로 요동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다. 최영은 최고 지휘관인 8도 도통사로 후방에 남고 이성계가 야전 사령관격인 우군도통사로 출병했다. 하지만 진군을 늦추던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등을 제거함으로써 고려의 정치적. 군사적 실권을 장악했다.
● 전제개혁과 과전법의 실시
위화도 회군으로 권문세족의 정치적 권력을 빼앗은 신진 사대부가 권문세족의 경제적 실권인 토지를 빼앗아 버린 사건이 전제개혁이고, 그 과정에서 새로 실시한 토지 제도의 명칭이 과전법이다. 이로서 권문세족은 모든 실권을 박탈당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토지제도는 신라의 녹읍과 관료전, 고려의 전시과가 등장했으나 고려의 전시과 제도는 무신정변 이후 무너져 내렸고 권문세족의 집권시기에 이르러서는 국가 재정을 좀먹고 백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태조 즉위시에는 논공행상에 따라 역분전을 지급하였고 문벌귀족시대에는 전시과를 무신집권기에는 녹봉만을 지급하다가 몽고의 침입으로 녹봉지급이 어려워지자 녹과전을 지급했다. 이후 권문세족 집권기에는 권문세족이 대농장을 소유하게 되자 공양왕 때 과전법을 실시하여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신진사대부들은 국가 재정의 안정과 농민 생활의 보장을 명분으로 새로운 토지제도를 실시했으나 실제 속셈은 신진사대부 일파가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전국의 토지를 조사해 새로운 토지대장인 양안을 작성하고 토지의 수조권을 재분배함으로써 신진관료들의 생활 기반을 보장했다. 또 불법으로 겸병된 권문세족의 토지들은 환원해 농민들의 경작권을 보장하고 조세율을 조정하는 등 농민 생활을 보호하려했다. 결국 전제개혁 곧 과전법의 실시는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실권 장악을 최우선 목표로 해 농민 생활의 보호와 그를 기반으로 한 국가 재정의 확보 등 다목적용 개혁이었던 것이다.
● 온건파 사대부 제거와 조선의 건국
위화도 회군으로 신흥 무인 세력인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 세력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실권을 장악한 이후 개혁의 기회를 맞이하지만, 이들 신진사대부 세력은 개혁의 방법론상의 차이로 분열했다. 이들 개혁론자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 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로 나뉘어진다. 이색. 정몽주 등 정치 안정을 바라는 대다수 사대부들을 포함한 온건 개혁파들은 비리세력 제거와 대토지 사유는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정도전. 권근 등 급진 개혁파들은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 소유를 축소하는 대대적 개혁을 추구했다. 정도전은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을 바탕으로 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비록 소수였지만 급진 개혁파가 권문세족과 온건 개혁파의 저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국민적 영웅이었던 이성계와 손을 잡음으로써 농민 군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즉 급진 개혁파와 이성계 세력이 결속하여 혁명파를 이루었다. 위화도 회군 직후에 옹립한 창왕을 다시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혁명파는 온건 개혁파의 세력을 꺾고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른바 폐가입진 즉 거짓을 없애고 참을 세운다는 명분을 내세워 우왕이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므로 그 아들인 창왕 역시 왕의 자격이 없다고 억지를 부려 축출했다. 정몽주가 고려를 향한 충절의 피를 뿌린 것을 마지막으로 온건파 사대부 세력은 제거되었고 이후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성계는 공양왕으로부터 선양형식 즉 자손이 아닌 유덕한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형식으로 왕위를 이어받아 역성혁명에 성공했다. 조선 건국초기인 15세기에는 혁명파인 정도전 권근 등이 관학파로 분류되고 세조이후 이들은 훈구파로 불리게 된다. 15세기의 관학파와 16세기에 권력을 잡는 사림파의 차이점을 대표적으로 이해하기 쉬운점은 관학파는 이방원의 하여가파와 사림파는 정몽주의 단심가파로 구별하면 거의 맞아떨어진다. 관학파는 이방원의 시인 이런들 어떻리 저런들 어떻리..... 즉 조선 초기에 이들 관학파인 정도전 권근 등은 타 사상도 포용했으며 사장을 중시했고 부국강병과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를 추구했고 현실적이고 융통성이 있었다. 반면에 사림파들은 정몽주의 단심가파로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 즉 온건파인 정몽주 길재 등은 오르지 절대적 성리학 신봉자들이며 타 사상을 배격하고 왕도정치와 향촌자치. 학술. 언론 경학 등을 중시했으며 관념적이고 원칙주의자였다.
※ 고려왕실은 34대 474년으로 막을 내림
야사에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내친 후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킬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문을 붙여 한 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짐. (방문의 내용 :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기왕에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 행배를 탔다가 모두 수장됨.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간파한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았으며 ( 全, 田, 玉, 龍,)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 조선 왕조 ■
▣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간도)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고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를 얻었다. 그러나 원이 고려출신의 이주민들에 대해 원주민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 차별호적을 만들어, 차별 정책을 실시하자,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한다. 당시 원은 명에 의해 중원으로 밀려나자,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가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자춘은 이러한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 병사하고, 그의 차남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 위화도회군과 4대 불가론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는데다 철령이북 땅이 원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으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고려를 명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이에 고려 정부는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1388년 2월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기지인 요동을 정벌하고자 했다. 이에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여 그 해 4월 요동정벌을 감행했다. 요동정벌 -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5월에 위화도에 당도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장마로 압록강 물이 엄청 불어나 강을 건널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이성계는 우왕에게 요동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유명한 사대불가론으로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리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고 주장하자,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해 최영 군대와 접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최영을 유배시키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내고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창왕을 옹립한다. 조민수와 이성계 일파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조민수가 차기 왕으로 창을 내세우는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손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양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아홉 살인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한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 당하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와 창을 죽인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되자 이성계일파는 고려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화 되었고 마침내 1392년 7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이성계는 왕으로 등극하고, 공양왕을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 부문에서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제5공화국의 등장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렸고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을 떠돌다가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 제1대왕 : 태조 이성계(1335-1408. 재위기간: 1392.7-1398.9. 집권 6년2개월 76세)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그 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마침내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로 고려 국왕으로 등극하고, 1393년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다. 또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수도를 물색 케 하고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을 새 수도로 삼는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법전이 편찬되었다. 또 숭유 억불정책을 시행하여 서울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불교를 탄압하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하자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방원은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도 함께 살해했다. 이성계가 와병 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그는 몹시 상심한 나머지 그 해 9월에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이성계는 방원에게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 덕안전을 새로 지어 정사로 삼고 염불삼매의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성계는 3명의 아내에서 13명의 자식을 얻었다.
▣ 신의왕후 한씨
▣ 신덕왕후 강씨 - 그녀는 신의 왕후 한씨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자 한씨 소생들과 대립하게 된다. 1396년 사망 후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차례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도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00년 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 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한편 태종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했고,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청계천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적인 불노를 표출했다.
▣ 방석 1382년-1398년 - 조선 개국 원년에 세자 책봉 문제가 일어났을 때 배극렴 등이 방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이때 왕비 한씨는 죽고 없었기에 계비 강씨의 의향에 따라 태조는 무안군 방번을 세자로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은 방번이 성격이 광망하고 경솔하다며 방번의 세자 책봉은 반대했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방석은 어머니 강씨의 보살핌과 정도전, 남은 등의 지원에 힘입어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강씨가 죽고 태조마저 병석에 눕게되자 그의 배후세력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 틈을 타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방석을 유배시키고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에 실패하고 32세에 처형되자 후사가 완전히 끊겼다.
● 새 도읍지 한양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하자 무학과 정도전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왕성을 옮길 계획을 세운다. 일차적으로 계룡산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여 왕성건립을 시작했다. 그러나 계룡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하륜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다시 한양으로 변경 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왕이 서경인 평양과 남경인 한양에 궁궐을 짓고 돌아가면서 머무르면 국운이 크게 융성한다는 지론에 따라 숙종 5년인 1101년 북악산 기슭에 궁궐을 짓기도 했다. 일찍이 도참사상의 대가로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도선은 '한양은 전국 산수의 정기가 모두 모이는 곳이기에 반드시 왕성이 들어 설 것이며, 왕성의 주인은 이씨가 될 것' 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에 고려왕조는 이를 염려하여 고려 중엽에 윤관으로 하여금 북악산 남쪽에 오얏(자두)나무를 심었다가 그것이 무성하게 자라자 베어 버리게 했다. 즉 오얏李의 성한 기운을 없애 이씨가 왕조를 세우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한양으로 도읍지는 정해졌지만 궁터만은 쉽게 정하지 못했다. 하륜은 모악산 아래 지금의 신촌으로 무악은 인왕산을 진산으로 하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용호로 삼아야 한다고 했지만, 정도전은 대왕은 남으로 향하는 법이지 동향을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면서 북악산 아래쪽을 극구 주장했다. 이에 무악은 화산인 관악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궁을 앉히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쳐 우환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정도전은 관악의 화기는 한강이 막아 낼 수 있다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정도전의 의견을 채택하여 북악산 아래에 왕성을 짓고 궁궐을 남쪽으로 향하게 했으며,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불을 잡아먹는다는 전설의 동물인 해태석상을 경복궁 앞에 세웠다.
▣ 정몽주 1337년 - 1392년. 연일정씨
정몽주는 1337년 경상도 영천 땅에서 한미한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살이에 나간 20세 후반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색에게서 성리학을 열심히 배우고 현실개혁에도 눈을 떴다. 특히 정몽주는 자기보다 연하인 정도전을 아껴 그에게 '맹자'를 선물로 주며 학문을 권장하기도 했다. 정몽주는 조정에서 촉망받는 벼슬살이를 이어갔다. 그러나 정몽주·정도전 등은 신진 세력이었기 때문에 권신들과 잦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또 이들은 유학자 출신이었기에 불교도와도 분란을 일으켰고, 친명파였기에 친원파와도 정적의 관계가 되었다. 정도전이 이러한 면에 대하여 급진적이었다면 정몽주는 온건적 입장이었다. 1375년(우왕 2), 권신인 이인임 일파에 대해 탄핵하면서 정몽주는 경상도 언양에서 귀양살이를 2년 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후 그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제학 등의 벼슬을 받아 활동하기도 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정몽주는 조전원수로 이성계를 따라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다시 1383년 이성계와 함께 북쪽 오랑캐 방비에 나서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이성계와 사귀게 되었다. 정몽주는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정도전을 서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성계와 정몽주의 도움으로 정도전은 대사성 등의 벼슬을 누렸다. 1388년 최영과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나섰으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최영 등 보수세력을 제거하고 집권했다. 이어 우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신진세력의 기반을 확실하게 했다. 이때 정몽주와 정도전은 각기 좌익·우익에서 이성계를 도왔다. 차츰 이성계는 실세로 부상하였다. 더욱이 이들 신진 세력은 이성계의 명망을 업고 새로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곧 조준·남은·정도전 등은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소외되고 있었다. 이에 그는 이들 급진세력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굳혔다. 1392년 세자가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성계가 마중하러 황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몽주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겼다. 정몽주는 대간을 통해 정도전·조준·남은 등을 탄핵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급히 이 사실을 이성계에게 알렸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제거하기도 결정하였다. 이 사실을 들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성계 집으로 찾아갔다. 이방원이 정몽주의 심중을 떠보려할 때 정몽주는 '단심가'로 대답했다. 자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의중을 안 이방원이 수하장수인 조영규를 동원하여 선죽교에서 죽였다. 그리고 정몽주 세력들도 완전 제거되었다. 때는 1392년이었다.
▣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 개혁론자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로 나뉘어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 이었고, 고려 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에서 동문 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결국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성계는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변방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새 왕조를 주창하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출신성분 탓에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었고, 항상 주변의 세력으로 머물러야 하자 힘이 있는 이성계를 찾아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역설했고, 정도전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무학은 이성계 개인의 인성과 천명론을 들먹이며 그를 부추겼고, 결국 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 정도전 :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꿈꿈. (1342년 경북 영주출생, 62세)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 이미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 때문에 동문수학 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고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자 역성혁명을 꿈꿀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덕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울 수 있었으며 거기서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인 1360년 성균시에 합격하고 그 후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다. 1375년 이인임 등 친원세력과 맞서다가 나주 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 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 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이성계를 찾아가 인연을 맺고 그의 천거로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전제 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그 다음해 봄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등의 탄핵을 받아 또 다시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 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략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 나와 그 해 7월에 조준, 남은, 방원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새로운 법제도의 기틀을 닦았으며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곡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확보, 진법훈련, 사병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 집중운동을 펼쳐 나간다.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해 왕이 나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같은 노력은 사병혁파에 위기를 느낀 방원의 무력동원으로 중도에서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 되는 것을 두려워한 방원은 사병을 이끌고 내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도 죽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해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했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 키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조선개국의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 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길을 가르쳤다. 명의 곡물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립을 실행했고, 병권 집중화운동으로 군권을 안정시켰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 무학 :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수있다는 확신을 심어 줌. 1327년 경남 합천 출생. 79세.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알려졌다. 무학의 부모는 고려말 당시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에게 끌려가다 간신히 탈출하여 안면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해서 그의 행적은 출가 이후 일부만이 겨우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학은 출가한지 몇년 후에 원으로 유학하여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스님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또한 원에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후에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나옹은 무학을 전법제자로 삼았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그가 천민출신이라 이를 용납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옹은 문도들의 반대로 그에게 의발을 전수 하지도 못하고 전법제자임을 알리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그는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에서 수도생활에만 전념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천문지리와 음양도창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 술에 능했다. 그를 찾아온 이성계가 問자를 짚어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君이라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 서까래 세 개를지고 왔다는 이성계의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王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대했고, 조선개국 이후에도 왕사로 받들었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거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조선 개국의 주체 이면서 그 기득권을 전혀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 제2대왕 : 정종. 1357년-1419년 재위기간 : 1398년 9월-1400년. 11월. 기간 2년2개월 61세.
정종은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수있느냐"?고 반문 하며 세자 되기를 극구 사양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 후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비록 왕좌에 있긴 하였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정종 때의 정치는 거의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 되었다. 1399년 한양의 지형에 문제가 있다 하여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겨갔으며 분경금지법을 제정 관인이 왕족과 외척들에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 이 일어나자 방원을 세제에 책봉했고, 왕족 및 권력가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삼군부에 직을 두고 있는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모두 방원의 영향력 하에서 이루어졌다.
1399년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했으며,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노비 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했다. 정종은 재위시에는 정무 보다는 격구 등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 이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 났다.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 뒤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 숙종7년에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모두 8명의 부인에게서 15남 8녀를 얻었다.
▣제1차 왕자의 난 : 1398년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을 제1차 완자의 난이라 한다.
1396년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세력인 신덕왕후 강씨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복귀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자,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 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정적의 기세를 완잔히 제거하는 셈이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려 방석과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냈다가 방번과 함께 살해했다. 태조는 이때 와병 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뒤늦게 방석형제가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는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제2차 왕자의 난 :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400년. 동복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자,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조기에 진압, 이일로 방원은 세제 자리를 확보.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11월에 왕위를 물려줬다.
태상왕이 된 태조 이성계는 옥새를 넘겨주지 않은 채 소요산으로 떠났다가 다시 함흥에 머물렀다. 이때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남. 태조가 물러난 것은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 중 이라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태조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 한양으로 와 불도에 증진. 1408년 5월 24일 창덕궁별전에서 74세로 죽음.
■ 제3대왕 : 태종 이방원 1367년-1422년. 재위 : 1400년11월-1418년 8월. 17년10개월.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되자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제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방원은 세제로 책봉되자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 집권의 틀을 다져 나갔다.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했고 중추윈을 삼군부로 고쳐 군정을 맡게했다. 이처럼 방원은 세제 시절에 이미 왕권 안정책을 마련하고 고려 정치문화의 잔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정무와 군정을 분리하고 1400년11월 마침내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3대왕으로 등극 했다. 수도를 개성에서 다시 한양으로 옮겼으며 호구법을 제정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 와 인구를 파악했다. 그는 왕으로 등극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 한층 박차를 가했고,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여 고려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군사제도를 정비해 국방을 강화하고 토지, 조세제도의 정비를 통해 국가 제정을 안장시켰다. 노비제도를 새롭게 정비하고, 신문고 등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자유롭게 청원케 하는 등 새로운 사회 정책을 실시하여 민심을 수습하였다. 태종은 교육과 과거제도 정착에도 역점을 두어 귀족위주의 관리 등용제도를 혁파하고 능력과 실력 위주로 관리를 등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했다. 태종은 이처럼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고 조선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 정치는 그가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러한 개혁에 힘입어 세종대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기 전인 1418년 장자인 양녕대군이 절제없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는 이유로 세자에서 폐하고 충령대군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왕권을 이양했다.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네 차례나 선위파동을 일으켰고, 상왕이 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 박습의 옥을 치죄하고 병선 227척, 군사1만7천여 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1422년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태종은 12명의 부인과 29명의 자녀를 두었다.
▣ 태종의 선위 소동
태종은 재위 6년(1406) 8월 하늘의 재변이 잇따르자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며 세자 이제(李?·양녕대군)에게 양위하겠다고 선언했다. 태종 못잖은 정치 고수인 신하들이 이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란 사실을 모를리 없었다.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 이화와 영의정부사 성석린이 원로들과 백관을 이끌고 여러 날 동안 명의 환수를 요청하자 태종은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소동은 끝났다. 그러나 1년 후 태종의 처남 민무구·민무질이 선위 소동 때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다[喜形于色]”는 등의 이유로 이화 등 백관과 대간들의 집중적인 탄핵을 받은 끝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태종 10년(1410) 3월 유배지에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양위 소동의 행간을 읽는 정치 식견이 부족했던 탓이다.
● 원경왕후 민씨 : 본관은 여흥이며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65년에 태어났다. 태종보다 두살 위였던 민씨는 태종의 집권에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었고, 1398년 8월 그녀는 정도전 세력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함께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정도전 일파의 급습 가능성이 있다고 주의를 환기 시켰고 방원은 그녀의 정보 덕분에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 태종은 외척세력의 권력분산과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후궁을 늘려 나갔고 민씨는 이에 노골적인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를 건드렸다. 이것이 곧 그녀의 동생 민무구 형제에게 영향을 미쳐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급기야 민무구 형제가 죽게 되자 그녀는 그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행동을 계속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세자와 왕자들에게 끼칠 영향을 생각해 끝내 그녀를 폐비 시키지 않았다. 원경왕후 민씨는 1420년 56세를 일기로 죽었다.
※ 양녕대군 : 자유분방. 사냥과 풍류를 좋아함. 스스로 왕세자 자리를 거부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고하나 정확 치 않음. 1418년 세자에서 폐위 69세 사망.
※ 효령대군 : 동생 충령이 세자에 책봉되자 스스로 불교에 심취 그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대왕에 걸쳐 91세까지 삶. 왕의 연고 존친으로 극진한 대우와 존경을 받음.
※ 충녕대군: 세종.
※ 성녕대군: 14세 때 홍역으로 죽었다.
● 태종시대의 주요 5대사건
▣ 민무구 형제의 옥 - 태종은 제위 18년 동안 네 차례의 선위파동을 일으켰는데, 제1차 선위파동이 민무구 형제의 옥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407년 태종이 선위를 표방하자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어린 세자 틈에 끼어 집권을 획책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태종과 왕후사이의 불화였다. 이 때문에 외척 세력으로써 아버지 민제와 왕비의 권세를 믿고 활개를 치던 민씨 형제들은 불만을 품게 되고, 태종이 선위 할 뜻을 비치자 세자인 양녕을 찾아가 그런 불만을 토로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옥이 발생하게 된다. 옥이 발생한 후 이틀 만에 태종은 민무구를 연안에 방치했으며, 공신녹권을 빼앗고 직첩을 수취하여 민무구 형제를 서인으로 전락시키고 여흥으로 유배시켰다. 태종은 정비 민씨와 장인 민제 장모 송씨의 면목을 생각해 가급적 생명만은 보전시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민씨형제는 유배 중에도 대간 등의 논핵을 가중시킬 행동을 자주 하다가 결국 1410년 자진하였다. 민무구, 무질 형제가 죽은 후 그의 형제들이 형들의 억움함을 호소하자 태종은 무휼, 무회 형제도 사사시켰으며 그들의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으로써 민씨 일가의 옥사는 종결되었다.
▣ 육조조직 단행 - 태종은 1405년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로 이뤄진 육조장관들의 품위를 정3품에서 정2품으로 높였다. 1414년 태종은 육조직계제를 단행했고 그 때까지 왕-의정부-육조 체제이던 국정이 왕-육조 로 전환되면서 왕권과 중앙 집권이 강화되어 왕조의 안정을 이루게 된다.
▣ 거북선의 개발 - 태종실록의 태종 13년에 보면 '왕이 임진강 나루를 지나다가 거북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해전 연습을 하는 모양을 보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태종15년에는 좌대언 탁신이 '거북선의 전법은 많은 적과 충돌 하더라도 적이 해칠 수 없으니 결승의 양책이라 할 수 있으며, 거듭 견고하고 정교하게 만들게 하여 전승의 도구로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거북선은 왜구 격퇴를 위한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된 일종의 장갑선으로 짐작된다. 거북선은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기에 고안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신문고 설치 - 시정을 살피고 백성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유롭게 청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였다. 태종은 훈신과 재상이 중심이 된 정치를 극복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을 통한 국가의 안정과 국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구현하려고 했다. 신문고는 태종의 이런 정치사상의 일환으로 시행된 제도이며,1401년 송나라의 등문고를 본따 설치했다.
▣ 한양으로 다시 천도 - 태조 3년에 개경의 기운이 다 됐다는 이유로 한양으로 천도했다가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정종은 개경으로 옮겨갔다. 태종은 등극 하자마자 태조의 뜻을 이어 다시 한양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신하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해 실행치 못하다가 1405년 창덕궁이 준공되자 한양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종 대에는 이 사건들 외에도 호구법을 제정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으며, 포백세와 호포세를 폐지했고, 환자치료를 위해 처음으로 동녀를 선발하여 부인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 태종시대의 세계 약사
1402년 보헤미아의 프라하대학 총장이 된 후스는 로마교회의 부패상을 고발하며 종교개혁을 시도하려다가 발각되어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쫓겨난다. 이후 다시 보헤미아 공화국에서도 파문된 후스는 1412년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비판하고 이 때문에 그는 파문당하고, 1414년 콘수탄츠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고 이듬해 화형당한다. 이 사건이후 1417년 교황 베네닉트 13세가 폐위되고 마르틴 5세가 즉위해 5개조의 개혁조령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기운은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 나간다.
■ 제4대왕 : 세종 충녕대군 : 1397년-1450년 재위:1418년 8월-1450년 2월. 집권31년6개월.
태종은 재위기간 중 네 번에 걸쳐 선위 파동을 일으킨다. 첫 번째는 그의 건강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무구 형제가 어린 양녕을 포섭하여 협유집권을 도모하려 했다는 탄핵사건이 일어나 민무구의 옥이 발생하면서 태종은 선위 문제를 뒤로 미룬다. 이후에도 태종은 선위 파동을 세 번이나 계속된다. 이것은 자신의 건강에 대한 불안감과 조선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계획과 자신이 일찍 상왕으로 물러나 왕이 성장할 때까지 왕을 보좌하면서 왕이 정사를 처리할 능력이 생기면 군정의 안정에 주력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태종은 세자인 양녕을 신뢰하지 않았고, 태종의 양녕에 대한 불신감은 급기야 세자를 폐하는 극단적인 조치로 나타났다. 1418년에 일어난 이 폐 세자 사건이 네 번째 선위 파동으로 이때 황희 등 조정 대신들 중 일부는 폐 세자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태종은 자신이 애써 이룩한 정치적 업적과 안정된 왕권을 양녕이 제대로 이어 나갈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 무렵 양녕은 궁중을 몰래 빠져나가 풍류생활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궁중 생활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수 차례에 걸쳐 그에게 심한 벌을 내려 군왕이 지켜야 할 덕행을 쌓도록 타일렀지만, 양녕은 태종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태종의 마음이 양녕에서 떠났음을 간파한 신하들은 마침내 세자를 폐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1418년 유정현 등의 청원으로 마침내 양녕은 폐위 되었다.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에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 도가 올랐다. 그가 바로 조선 4대왕인 세종이다. 태종은 충녕이 천성이 총민하고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등도 잘 안다 면서 세자에 책봉했다. 이처럼 태종은 충녕의 학문과 능력을 높게 평가하였기에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휼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되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의 안정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기틀을 확립했다. 세종은 태종이 죽은 1422년 이후부터 놀라운 정치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종대에는 개국 공신세력이 거의 사라졌고 그 덕분에 과거를 통하여 정계에 진출한 유학자와 유학적 소양을 지닌 국왕이 서로 만나 왕도 정치를 꿈꿀 수 있었다. 세종 시대의 권력 구조나 정치적 양상은 세종 19년을 분수령으로 두 시기로 구분된다. 세종은 이때를 전후하여 국가 기강의 중심이었던 육조직계제를 의정부서사제로 변혁하여 왕에게 집중되어 있던 국사를 의정부로 넘기는 한편, 세자로 하여금 서무를 결제하도록 하는 등 이전에 비해 더욱 유연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왕권 중심의 정치 형태인 육조직계에서 의정부서사제로 바꾼 것은 젊은 시절부터 당뇨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정무가 과다한 육조직계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집현전은 고려시대에 이미 설치된 기관으로 조선 정종 시대에도 설치된 일이 있었지만 세종초에 이르러 기능이 대폭 확대되었다. 세종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원만히 수행하기위해 필요한 인재의 양성과 학문의 진흥, 그리고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따라 집현전은 젊고 유망한 학자들이 채용되었고 그들에게는 여러 가지 특전이 주어졌다. 집현전 인재들은 주로 책 편찬 사업과 훈민정음 연구 사업에 투여되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쓰던 고어와 외국의 언어를 연구하여 훈민정음 체계를 완성했으며 농사직설을 비롯한 실용서적과 역사, 법률, 지리, 문학, 유교, 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이 설치되어 '혼천의'같은 천체관측 기계를 만들었으며, 해시계는 앙부일구, 현주일구, 천평일구, 정남일구 등이고 물시계는 자격루와 옥루가 있었다. 해시계를 일咎라고 한 것은 이것이 모두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세계최초의 강우량계측기인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국토의 개척과 영토의 확장을 통하여 국력도 신장했다. 김종서가 두만강 방면에 육진을 개척했으며,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박연을 통해 아악을 정리케 하고 금속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했다. 세종은 천부적인 능력과 뛰어난 인성 그리고 넓은 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기틀을 닦아 놓고 1450년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세종은 정비 소헌왕후 심씨를 비롯해 6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18명 4녀를 얻었다. 능은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 소현왕후심씨 1395-1446년. 본관은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의 딸이다.
심씨의 아버지 심온이 세종 즉위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헌사로 명나라에서 귀환하던 중, 아우 심정이 군국대사를 상왕인 태종이 처리한다고 불평을 했다가 옥사가 일어 났다. 심온은 이 사건의 수괴로 지목되어 수원으로 폄출되어 賜死 됨. 이 때문에 심씨를 폐하자는 논의 가 있었으나 그녀의 내조의 공이 인정 되어 폐비사태는 면하였다.
▣ 안평대군 1418년-1453년 세종의 셋째 아들.
함경도에 육진이 신설되자 1438년 왕자들과 함께 야인을 토벌하였으며, 권신, 황보인, 김종서등 문신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수양대군측의 무신세력과 맞서 인사행정인 "황표정사"를 장악하는 등 조정의 배후 신력자로 부상하였다.1452년 단종이 즉위한 후, 수양대군은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난 뒤 황표정사를 폐지하였다. 안평은 이에 반발하여 황표정사 회복에 주력했으나 이듬해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김종서 등이 살해된 뒤 자신도 강화도로 귀양갔다가 교동으로 옮긴 후 36세를 일기로 사사되었다. 안평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서, 화 모두에 능해 삼절이라 불리었고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명성을 떨쳤다.
▣ 금성대군 1426년 - 1457년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 방석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1452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과 함께 사정전으로 불려가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왕을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정권을 탈취하자 이에 반발하여 삭녕에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배당하자 자신의 유배지였던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모의하여 단종복위를 세우다 관노의 고발로 실패로 돌아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1791년 정조15년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을 편정 할 때에 육종영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 세종시대를 빛낸 사람들
희대의 명재상 황희와 맹사성
▣ 황희:1363년-1452 년 90세. 영의정
1363년 개성에서 태어난 황희는 불과 14세 때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고, 21세에 사미시에 ,23세에 진사시에, 4년 뒤인 138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에는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황희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하였지만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돌아왔다. 이후 태조와 태종의 신임을 받으며 성장을 거듭했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은 황희는 공신은 아니지만 공신대접을 하였고 하루라도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하였고 하루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하였다. 고 할정도로 특별히 그를 신임했다. 태종시절에 이미 이조판서에 올랐다. 1418년 양녕대군 폐위에 반대하다가 태종의 진노로 유배 세종4년 유배에서 풀려 관직에 돌아올 수 있었다.황희는 성격이 분명하고 정확 강직했으며, 1449년 스스로 물러날 때까지 87세라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영의정 직에 머물러 있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세종의 정치에 조언했으며 세종 사후에는 문종의 치세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청렴하고 학덕이 높았으며 사리에 밝고 치밀한 사람이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예법 및 임기응변에 뛰어났다. 인권을 존중하여 노비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은 그야 말로 선비중의 선비였다.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황희는 주로 병조, 이조 등 과단성있는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 맹사성:1360년- 1438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이조판서, 의정부 찬성사, 좌의정 등 맹사성은 황희가 두문동에 은거하는 것과는 달리 태조 때부터 예조의량직에 제수받는 등 관직에 그대로 머물고 있었다. 그리고 승진을 거듭해 1408년에는 사헌부 수장 대사헌의 직책에 올랐다. 그런데 황희와 맹사성은 태종의 두터운 신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에 의해서 한 번씩 파직을 당하게 된다. 맹사성은 사헌부 수장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사건을 치조하는 중에 태종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부마인 조 대림을 고문. 이 사건으로 그는 왕족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처형 직전 까지 간다. 당시 영의정 이었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죽음 면했지만 그는 이 사건으로 3년 동안 관직을 떠나야 했다.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에 맹사성은 공조판서에 올라 있었고 황희는 남원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하여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함. 예술가적임. 그는 평소에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기기도 했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몇 번이나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 과학 혁명의 주창자 장영실
장영실의 태생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동래현에서 관노생활을 하던 중에 재주가 출중하여 천거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당시 세종은 과학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신분에 상관없이 기술적인 능력이 있는 인재들을 찾고 있던 중 이었고, 동래현의 재주있는 관노로 이름이 나 있던 장영실이 인재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장영실은 발탁된 뒤 곧장 중국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유학중 장영실은 천문기기에 대한 식견을 가지게 되었고 귀국해서는 궁중 기술자로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능력 덕분으로 이미 세종 5년에 노비 신분에서 면천 되었으며, 상의원별좌라는 직책도 부여받았다.그는 유학에서 돌아와 물시계를 만들어 정 5품의 벼슬에 올라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에 매진했다. 이러한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장영실과 일군의 학자들이 해시계와 물시계, 측우기 등을 만들었다. 장영실의 과학적 업적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해시계의 하나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였다. 자격루는 장영실이 김빈과 함께 만든 것으로 중국과 아리비아의 것을 비교 연구하여 새로이 고안한 것이었다. 장영실은 자격루를 만든 공노로 대호군으로 승진했고, 이에 보답하기 위해 다시 태양 모양을 본떠 만든 천상시계와 물시계인 옥루를 만들어 궁중에 받쳤다. 옥루는 완전 자동시계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발명품이었다. 이처럼 장영실은 과학발전에 일생을 받친 조선시대 최고의 기술과학자였고, 천체의 원리뿐 아니라 자연 동력의 원리에도 밝았으며, 기계제작에도 뛰어난 면모를 과시하며 세종시대에 찬란한 과학 혁명을 이끌어 낸 선구자였다. 하지만 그의 노후 삶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있다.
▣ 음악의 귀재 박연 : 태종 대에 이조판서를 지닌 박천석의 아들로 1378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34세에 비로소 진사에 등과해 집현전 교리 등을 지냈으며, 주로 사헌부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봉상판관 시절에 그는 음악적 능력을 인정받아 악학별좌를 겸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게 된 듯하다. 세종대의 음악적 부흥은 크게 아악의 부흥, 악기의제작, 향악의창작, 정간보의 창안 등으로 대변될 수 잇는데, 이는 모두 박연이 이룬 것이었다. 그는 노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향악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다가 1458년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농사직설을 집필한 정초
농사직설은 곡식재배에 필요한 수리, 기상, 지세 등의 환경 조건도 상세히 기술하여 농민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곡식을 재배하면 유리한지 알 수 있게 했다. 이 책의 특징은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정초의 이러한 농업관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 대마도를 정벌한 이종무와 육진을 개척한 김종서
▣ 김종서:1390년생. 16세 되던 해인 140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1415년에는 상서원직장을 지냈으며 태종신록 편찬을 주관한 세종시대의 대표적인 문신이었다. 이후 광주판관, 이조정랑 등을 거쳐 1433년 함길도 도관찰사로 육진 개척에 투입된 그는 약 10년 가까이 육진 개척에 전념하여 두만강을 국격으로 확정짓는 성과를 올렸다. 육진 개척 후 김종서는 경상 3도순찰사, 의정부 우찬성 등을 거쳐 문종 대에는 좌의정에 올라 대단한 위세를 떨쳤지만. 1452년 단종원년에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이종무:1360년생.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던 그는 1381년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로로 무인으로 등용되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는 방원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킴으로써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좌군절제사, 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세종 즉위 다음해인 1419년에는 삼군도제찰사에 올랐다. 이 해 5월 왜선 39척이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이종무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대마도 정벌 후 대규모의 왜구는 사라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은 평화시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 후 찬성사로 승진하였고 한때 대간들에게 탄핵되어 유배되기도 했지만 복관되었고, 이후 부원군에 진봉 되었다가 1425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세종시대의 세계는 1419년 종교개혁 문제와 관련하여 신성로마제국에서 보헤미안전쟁이 발발한 이래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대부분의 국가들이 30년 전쟁, 백년전쟁, 도시전쟁 등으로 전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 전란의 와중에서 프랑스의 잔다르크가 화형되었으며, 독일에서는 1455년 쿠덴베르크의 인쇄본이 간행되었다.
■ 제5대왕 문종(1414년-1452년. 재위:1450년 2월-1452년 5월. 집권 2년3개월.)
문종은 세종 즉위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에 머물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수 및 산술에도 뛰어났고 서예 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물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6품 이하의 신하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렇듯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제위 2년3개월만에 39세 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첫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가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해 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제6대왕: 단종(1441년-1457년. 재위 : 1452년 5월-1455년 윤6월. 집권 3년 2개월)
현덕왕후 권씨는 26세에 단종을 낳고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에 혜빈 양씨는 세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8살 되던 1448년(세종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하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유성윈,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이는 세종자신 도 이미 병세가 악화돼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처지였고 세자 향(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 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세종이 이런 간곡한 부탁을 한 것은 자신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 이었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 하자 홍위는 세자로 책봉된다. 문종은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 한다는 고명을 남기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세자 나이 12세였다. 단종이 12세에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 하는 것이 일반적 이었는데,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왕비도 없었다.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았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데 그쳤다. “황표정사” - 대신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어있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의 세력이 팽창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왕숙들이(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둘째인 수양과 세째인 안평은 서로 경쟁을 벌여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만다.
※ 계유정란 : 명목은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1453년 4월 명나라에 고명사로 갔다 돌아온 수양은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고,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김종서를 철퇴로 죽이고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여 참살당했다. 이들의 죄명은 안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란으로 고명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하였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신임 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무위로 끝났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수현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 수양대군이 자기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 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 갔다. 이후1456년 6월에 상왕 복위 사건이 일어나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 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에 17세의 나이로 賜死되었다.
▣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당시 조정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해 10월에 좌의정을 내놓게 되고 좌의정에 김종서, 우의정에 정분이 앉게 된다. 당시는 의정부서사제였기에 조정의 권력은 의정부의 삼정승이 쥐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된 남지가 정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자 조정은 황보 인과 김종서가 좌지우지하는 상황이 되었고,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 두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단종실록에는 이들 대신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실록이 세조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 단종복위사건(1455년) : 1455년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 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집현전 학자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 되었다. 당시 세조는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순간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 이었다. 하지만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암살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사실을 알려 단종복위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힌다.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과 같이 모이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더 추궁하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집현전학자 출신의 단종복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폐되었는데, 또 한번의 단종복위 사건이 금성대군에 의해 일어난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불리우다가 1698년 숙종 24년에 복위되었다.
※ 사육신 :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 중종 때 사림파들이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남효은이 지은 육신전에 사육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한다. 참고적으로 사육신 묘에 모셔져 있는 사육신은 7명입니다. 사육신에 대한 논란은 있었으나 일반적으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로 알려져 있으나 유응부 대신에 단종복위운동 당시 공조판서로 있던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하여야 한다는 김녕김씨의 주장으로 기계유씨와 사육신을 놓고 분쟁하기도 하였기에 누굴 빼고 누굴 넣을 수 없어 김문기를 더 모시게 되었습니다.
사육신의 진실
서울특별시가 사육신 묘역 정화사업을 전개하면서 사육신 문제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의해 옴에 따라 우리 위원회는 1977년 9월 22일 위원회의를 개최하고 세조실록 등 자료를 검토한 후, 김문기가 병자정난(단종복위 모의사건)의 주모자로 관련되어있는 사실을 확인, 회신하였습니다. 1977년 10월 24일자로 서울 특별시장으로부터 김문기의 가묘를 사육신 묘역에 봉안하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 위원회의 의견을 물어왔는데, 이에 대해 동년 12월 29일자로 묘역처리에 관한 문제는 우리위원회가 관여할 사항이 아님을 회신하였습니다. 그 후 세간에서 사육신의 관한 논란이 있었고, 백촌 김문기선생 충효사상연구소 등으로부터, 사육신의 구성에 관한 질의가 있었으므로, 1982년 11월 11일 위원회의를 열어, 1977년 12월 29일자 회보 내용을 검토한 후, 김문기 선생을 현창顯彰 하되, 종래의 사육신 구성「성상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에 대하여는 변경한 바 없음을 확인한다고 회보하였습니다. - 국사편찬위원회.
※ 생육신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은. 세조 때 한평생 벼슬을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켰다. 이 중 남효은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 제7대왕 : 세조(1417년-1455년. 재위:1455년-1468년. 집권 13년 9개월. 52세.)
▣ 수양대군의 정국 전복과 왕위찬탈
단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정국의 구도는 왕족파와 고명대신파로 나뉘었다. 왕족 세력 속에는 수양대군을 견제하는 안평대군이 재상정치를 목적으로 하는 있던 대신들 속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독점을 비판하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단종은 너무 어린 관계로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왕족인 안평대군을 내세워 수양대군의 세력팽창을 견제했다. 한편 수양은 1452년 집현전 교리 권람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했다. 수양은 1452년 9월 명나라가 단종의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정에서는 사은사를 명에 보내기로 했는데, 수양은 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종친의 의무임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가야 한다고 우겼다. 그 후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의 거사 계획은 급진전 되고, 수하에 신숙주를 끌어들이는 한편, 김종서를 철퇴로 죽인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내노라하는 무사들을 수하에 두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양성한다. 1453년 10월 10일 밤 이미 살생부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들 신하들을 죽인 명분은 김종서가 황보 인,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하여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 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계유정란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출신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 동조했다. 이들은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의 핵심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복위를 기도하게 되고, 또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자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신숙주 - 예조판서(외교통)
한명회 - 병조판서(군사통)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함
조석문 - 호조판서(재무통)
▣ 세조의 강권정치와 문치의 후퇴
세조는 즉위한 뒤 단종을 상왕에 앉혔다. 하지만 이듬해 좌부승지 성삼문 등 이른바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 사건을 계획한 것이 발각되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영월에 유폐시키고 1457년 금성대군이 다시 한 번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그를 사사시키고 단종도 관원을 시켜 죽였다. 세조는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차례로 제거한 뒤 왕권강화 정책에 착수 했다. 우선 일종의 내각제인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 왕권제에 가까운 육조 직계제를 단행했고 집현전을 폐지시키고 정치 문제를 토론하고 대화하는 경연을 없앴으며, 그곳에 설치된 서적들을 모두 예문관으로 옮겨버렸다. 이 때문에 국정을 건의하고 규제하던 기관인 대간의 기능이 약화되고, 왕명을 출납하던 비서실인 승정원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승정원은 육조 기관의 사무 이외에 국가의 모든 중대 사무의 출납도 함께 관장하게 되었다. 이 밖의 왕권 강화책으로 백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태종조에 실시했던 호패법을 다시 복원했으며 동국통감을 편찬해 전대의 역사를 조선왕조의 견지에서 재조명하고 국조보감을 편수해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4대의 치법과 정모를 편집하여 후왕의 통치 법칙으로 삼았다. 이런 일련의 왕권강화책을 통해 안정기에 접어들자 세조는 왕도 정치의 기준이 될 법제 마련에 박차를 가했다. 최항으로 하여금 경제육전을 정비하게 했으며, 왕조 일대의 총체적법전인 경국대전의 찬술을 시작했다.1460년에는 호전을 복구했으며, 1461년에는 형량을 규정한 형전을 개편, 완성했다. 세조는 역모와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 군정 정비에도 각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462년에는 각 고을에 명하여 병기를 제조하게 했으며, 이듬해에는 모든 읍과 병영의 둔전을 파악하고, 모든 도에 군적사를 파견하여 군정 누락을 조사하게 하였다. 또한 종래의 현직과 휴직 또는 정직관원에게 나눠 주던 과전을 현직관원에게만 주는 직전제를 실시해 국비를 줄였으며, 지방 관리들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지방의 병마절도사는 그 지방 출신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이 같은 중앙 문신위주의 정책은 지방호족의 불만을 자아내 급기야 이시애의 난 같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함길도 길주에서 일어난 이 반란으로 한때 조선은 전운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세조는 이 난을 무사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다져나갔다. 세조는 또한 민간에 만연해 있던 공물을 대납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했으며, 누에 농업을 위해 잠서를 훈민정음으로 해석하고 백성들의 윤리 교과서인 오륜록을 찬수해 윤리 기강을 바로 잡았다.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 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 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결, 대명률강해, 금강경언해, 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개편과 관리들의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 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운영 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도 실력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사를 운영했는데, 이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봉직하고 있었다. 또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켜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의 불교 융성책은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세조의 친불 정책은 유교 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 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를 비롯 2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얻었으며 능은 남양주 진접읍에 있는 광릉이다. 그가 묻힌 광릉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면서 석실과 병석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 원상제 :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삼 중신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 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 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 정희왕후 윤씨 1418-1483 :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 하였으며, 예종이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 을산 군을(성종) 그 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인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녀는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둘째인 자을산군이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장인 인지라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결탁하여 결국 둘째인 자을산군에게 왕위를 넘겼다.
▣ 의경세자 1438-1457 :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145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한확의 딸인 소혜왕후 한씨를 아내로 맞아 1454년 월산대군을 낳고 1457년 성종을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잦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도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상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 세조의 무단정치를 수행한 사람들
세조 때 정난공신 세력은 권람과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조의 심복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주축으로 하는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 두 세력의 공통점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거나, 또는 이들의 정권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심복세력들은 수양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학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학사 세력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으며, 그 대가로 세조 시대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수양의 좌장 권람 1416-1465
세조의 심복 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인물은 권람이었다. 그는 한명회와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도모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커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찾아다니며 학문을 쌓았고, 이때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는다. 그는 한명회와 '남자로 태어나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는 약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1450년 35세라는 늦은 나이로 향시와 회시에서 장원 급제했다.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써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는데 동참하여 그와 가까워진다.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독점하게 되었다. 또한 안평대군이 그들 대신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수양대군이 이에 불안을 느끼며 동지를 찾고 있을 때 권람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 접근하여 집권거사를 모의한다. 계유정란에 성공하자 정란공신 1등에 책록된 그는 집현전 교리에서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2월에는 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시 1년 뒤에 이조판서에 올라 집현전대재학,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였다.1458년 신숙주와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 해 12월에 의정부우찬성, 이듬해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그는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문장에 능했고 호탕한 성품에 활 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청년시절에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돌아 다닌 것은 아버지 권제가 첩에 혹하여 어머니를 내쫓 은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으며, 그러다가 한명회를 만나 권력을 꿈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양과 함께 정난을 일으켜 그의 좌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 수양의 장량 한명회 1415-1487년. 수양의 최고 책사임. 계유정난 1등공신. 조선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돼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 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일찍부터 부모를 여윈 탓에 소년시절을 불우하게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시험에 번번이 실패해 38세에 겨우 음문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과단성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찾아가 거사를 논의케 했고, 다시 권람에 의해 천거 되어 수양의 책사로써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그는 계유정란 때 살생부를 작성하여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고, 1456년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사건을 좌절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이조판서, 병조판서, 4도제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할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 손에 거뭐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 직이었던 그가 불과 13년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관계를 맺음으로서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 나갔다. 세조와 사돈을 맺어 딸을 예종비로 만들었고 둘째 딸을 성종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후를 내게 했다. 신숙주와도 인척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우인 권람과도 사돈관계를 맺는다. 1466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한다. 세조는 즉위 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고 이시애의 보고문만 믿고 가장 믿음직스러운 두 신하는 신문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으로써 정사의 서무를 결제하였다. 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 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 그가 죽은 후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참시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 세조의 위징 신숙주 1417-1475년
신숙주는 세조와 동갑내기로 22살 되던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에 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정리작업에 참여하다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차례나 요동을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東方巨擘이라는 찬사를 얻기도했다. 신숙주는 1452년 수양이 사은사를 자청하자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1453년 신숙주는 승정원에서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지만 김종서 등의 권신들의 경계를 받아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10월에 외직에 나가 있었다. 이런 현실로 보아 신숙주는 수양의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앉았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 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 17대 왕이 된다. 이후 그는 병판, 좌찬성, 우의정, 좌의정을 거처 마침내 46세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에 영의정 부사직을 사직한다. 하지만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에 따라 한명회와 함께 원상으로 서무를 결제하는데 참여하고, 이듬해 예종이 죽자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왕으로 추천해 결국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데 성공한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계에 남아있다가 147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 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했으며,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롭게 만들었다. 또한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었을 정도였다. 또한 그는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 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화명사 예금 시거 등의 작품을 남겼다.
■ 제8대왕 : 예종 1450-1469년. 재위:1468.9윌-1469.11월. 집권 1년2개월. 21세 사망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했으나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 마져 좋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또한 왕의 업무 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해 원상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1468년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각도에 있는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 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예종의 능호는 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오능 묘역에 있다.
※ 원상제도 :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항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제만 하는 제도였다.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은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 장순왕후 한씨 1445-1461 :예종의 정비이며 한명회의 큰 딸임. 1460년에 세자빈에 책봉됐으나, 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친동생이 성종의 비 공혜왕후이다.
▣ 제안대군 1466-1525년 : 예종의 둘째 아들이며 안순황후 한씨 소생이다. 예종이 죽자 그의 나이는 4살이었고 왕위계승의 첫 번째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1498년 안순왕후가 죽은 후로 홀로 거처하였으며 노래를 즐기고 사죽관현 연주에 뛰어났다.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을 잘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패관잡기」에서는 ‘그는 성품이 어리석었다’고 기록하는 한편 그것은 몸을 보전 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라고 적고있다. 왕위 계승 전에 밀려난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고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 예종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 사건
예종은 재위 14개월 동안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는데,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상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남이, 강순의 역모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 무과에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시대 최고의 위기를 불러온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임하고 병권의 수장인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고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에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남이는 무예가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 할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나,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때문에 예종은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마침내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날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은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고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 때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써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을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진술하고,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같은 천변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변고 당할까 봐 두렵다'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 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영의정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등으로 모두 처형됐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역모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 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다가 예종이 즉위하고 병판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이의 역모사건은 단지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 극으로 믿고 싶었던 것이었다.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으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있는데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서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 장군 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다.
■ 제9대왕 :성종 1457-1494년. 재위 : 1469-1494년 12월. 집권25년 1개월 38세까지 살았다.
예종이 죽자 왕위계승은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으로(당시4세) 이어져야 하나,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이 결탁하여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을 예종이 죽는 날 왕에 앉힌다. 첫째인 월산군이 당시 16세였으나, 둘째인 13세의 자을산군으로 왕통이 이어진다. 이는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기에 정희왕후와 서로 결탁했다. 당시 한명회는 최대 권력가였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왕실세력의 중심이었던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다. 구성군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면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 불과 28세였다.그러나 막상 예종이 죽자 그는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정희왕후와 원로대신들은 왕위찬탈을 우려했고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 후 종친들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성종은 태어 난지 2달만에 아버지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射藝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 했는데도 그는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태조를 닳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 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20살 까지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사건을 살펴보면 호패법을 폐지하고 경국대전의 교정작업을 완료했으며 숭유억불정책을 강화하여 화장풍속을 없애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것을 금지했다. 외촌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했다. 또 각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하여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를 재배케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로 했다. 1476년 수렴청정이 끝나자 조정의 서무결재에 원로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출납과 서무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과 가까이 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1478년에는 참판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 공신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출신 신진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숭유억불 정책실시하고, 변방을 위협 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이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이래 가장 태평성대 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은 후기에 들어 유흥에 빠져 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 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페비 윤씨 사건은 결국 연산군대에 이르러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12명의 부인에게서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 소혜왕후 한씨 - 인수대비 1437-1504년. - 의경세자의 비. 월산대군과 성종의 어머니로서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다. 연산군이 폐비사건으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고양시 서오능에 의경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 공혜왕후 한씨 1456-1474년. 한명회의 둘째 딸이다. 1467년 12세의나이로 한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74년 19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죽자 공혜왕후에 추증되었다.
▣ 폐비윤씨 ? -1482년 -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 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 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 극약인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이 일이 발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었다.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일로 성종과 모후인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가 되고 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1482년 조정에서는 세자의 친모인 그녀의 거취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오르자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조정에서 따로 거쳐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성종은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윤씨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賜死하였다. 사사한 이후 묘비도 세우지 않다가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 까지는 폐비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연산군은 즉위한지 얼마되지 않아 임사홍의 고자질로 이일을 알게 되었다. 임사홍은 자신의 두 아들이 부마였으나, 사림들의 상소로 두 번이나 유배를 갔다 왔다. 사림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위해 유자광과 상의 하여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연산군에게 고자질했다. 이 폐비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일으킨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 정현왕후 윤씨- 자순대비1462-1530 -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왕비에 책봉 되었다.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과 함께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에 있다.
▣ 사림파의 등장과 조정의 세력균형
성종시대의 정치세력은 훈구세력과 근왕세력인 이른바 도학정치를 내세운 사림세력으로 형성되어 이들 세력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중심을 굳건히 다져 나갔다. 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하여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소인배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들은 사림들은 홀로 잘난 체하는 야심배들이라고 지탄하며 그들을 배격하였다. 두 세력은 주의와 사상이 달랐기에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성종의 사림파 중용책으로 인해 조정은 14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균형이 가능해졌다. 한편 중앙으로 진출한 사람파들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여 부패로 치닫고 있는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 척신세력들을 비판하자, 훈구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성종의 후원 때문에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에 밀리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자 사림세력의 지나친 팽창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한 이후 자위책의 일환으로 무오사화를 획책하게 된다.
※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1431-1492년 :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하여 1462년 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함양군수 등을 지냈고,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은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 특히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성종은 이들과 힘을 합해 훈구, 척신 세력의 독주를 저지하고자 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 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 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에는 세조의 부도덕함 을 질책하고 세조 때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려 훈구세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조의제문]..「화술주시」- 이것이 사초에 실려 있어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것을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에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다. 김종직은 유자광을 멸시하였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철거하여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후일 이극돈과 손을 잡고 무오사화를 도모하게 된다. 이극돈은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세조비 정희왕후喪 중에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 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과 이극돈이 뇌물을 받은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은 이사실을 알고 김일손에게 청을 넣어 삭제해주기를 바랬으나, 김일손은 거절했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했다.
▣ 조의제문
"정축 10월 어느 날에 나는 密城으로부터 京山으로 향하여 踏溪驛에서 자는데, 꿈에 神이 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楚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西楚 패왕에게 살해 되어 빈강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생각하기를 「회왕은 南楚 사람이요, 나는 東夷사람으로 지역의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이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역시 천 년이 휠씬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정녕 項羽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고, 드디어 文을 지어 조문한다. 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四大 五常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이적이라서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 손가. 그러기에 나는 이인夷人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하노라. 옛날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하니, 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유, 추애라도 어찌 보전할손가. 그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六國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編氓)가 짝이 되었다오. 항양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종將種으로, 어호魚狐를 종 달아서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름이여!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네. 건부를 쥐고 남면을 함이여! 천하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를 보내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는 족히 그 인의를 보겠도다. 양흔 낭탐(羊?狼貪)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축임이여!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에 있어, 나는 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반서를 당하여 해석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려.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을 솟음이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에 가깝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도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표탕瓢蕩하도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네. 자양紫陽의 노필老筆을 따라가자니,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欽欽하도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건대 영령은 와서 흠항하소서.’ 하였다." 그 ‘조룡祖龍이 아각牙角을 농弄했다.’는 조룡은 진 시황秦始皇인데, 김종직이 진 시황을 세조에게 비한 것이요, 그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을 따랐다.’고 한 왕은 초 회왕楚懷王 손심孫心인데, 처음에 항량項梁이 진秦을 치고 손심을 찾아서 의제義帝를 삼았으니, 김종직은 의제를 노산魯山에게 비한 것이다. 그 ‘양흔 낭탐하여 관군冠軍을 함부로 무찔렀다.’고 한 것은, 김종직이 양흔 낭탐으로 세조를 가리키고, 관군을 함부로 무찌른 것으로 세조가 김종서를 베인 데 비한 것이요. 그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 했느냐.’고 한 것은, 김종직이 노산이 왜 세조를 잡아 버리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반서를 입어 해석이 되었다.’는 것은, 김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아 버리지 못하고, 도리어 세조에게 죽었느냐 하는 것이요. 그 ‘자양紫陽은 노필老筆을 따름이여, 생각이 진돈하여 흠흠하다.’고 한 것은, 김종직이 朱子를 자처하여 그 마음에 부賦를 짓는 것을, 《강목(綱目)》의 필筆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일손이 그 문文에 찬贊을 붙이기를 ‘이로써 충분忠憤을 부쳤다.’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께서 국가가 위의危疑한 즈음을 당하여, 간신이 亂을 꾀해 禍의 기틀이 발작하려는 찰라에 역적 무리들을 베어 없앰으로써 종묘 사직이 위태했다가 다시 편안하여 자손이 서로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그 공과 업이 높고 커서 덕이 百王의 으뜸이신데, 뜻밖에 김종직이 그 문도들과 聖德을 기롱하고 논평하여 김일손으로 하여금 역사에 무서誣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어찌 일조일석의 연고이겠느냐. 속으로 불신의 마음을 가지고 세 조정을 내리 섬겼으니, 나는 이제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을 금치 못한다. 동·서반(東西班) 3품 이상과 대간·홍문관들로 하여금 형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화술주시和述酒時 : 도연명이 남조조의 송나라 무제가 동진의 안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여 지은 述酒時에 화답한 시로 세조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내용
※ 경국대전 완성의 의미와 형성과정
고려로부터 조선초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25년만인 1485년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져 오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문국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부, 충청도, 경상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 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초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등이 편찬하였다. 제 5권에서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제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르지 악학궤범에서만 볼 수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제10대왕 : 연산군 1476-1506년. 재위:1494.12월-1506.9월. 집권11년9개월. 31세 생을 마감.
연산은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연산을 탐탁치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에 책봉한다. 이에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 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한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때 세자 융의 나이는 8세였다. 1494년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폭군은 아니었다.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의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문신의 사가독서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다. 하지만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 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을 귀짢게여겼다. 이때 때마침 일어난 것이 1498년 무오사화이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해있던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사림 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세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을 흥청이라 했 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같은 사치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들 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생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윤씨 사건을 연산군 에게 밀고하게 된다. 내막을 자세히 모르던 연산은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 과 사간원, 홍문관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 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1506년 박원종, 성희안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그는 그 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의미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한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 들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관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은 인재등용에서도 과거제 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중종 때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 지게 되는데 이를 흔히 붕당정치라 부른다.
※ 무오사화 -戊午史禍 1498년「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이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화술주시」.
「조의제문」- 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또한 이극돈이 전라감사로 있던 중 세조비 정희왕후 喪 중에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 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었고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이때 유자광을 찾아갔고, 유자광은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김종직은 부관 참시형이 가해졌고 김일손,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했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정여창, 이수공, 정희량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리 밖으로 귀양보냈고, 김굉필, 강혼 등은 김종직의 문도로써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판하고 [조의제문] 의 삽입 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 보내 관청의 봉수를 짓게 하였다. 이극돈도 修史官으로써 사초를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됐다. 이 사건으로 신진사림이 죽거나 유배당 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 화술주시和述酒時 : 도연명이 남조조의 송나라 무제가 동진의 안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여 지은 述酒時에 화답한 시로 세조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내용.
▣ 조선시대 4대사화
1.무오사화 戊午史禍
2.갑자사화 甲子士禍
3. 기묘사화 己卯士禍
4 . 을사사화乙巳士禍
※ 갑자사화 甲子士禍 1504년 - 폐비 윤씨사건이 발단이 됨. 무오사화로 언론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고, 매일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수 백명의 기생이 동원 되었다. 이렇게 사치와 향략이 심해지자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국고가 빈 것을 안 연산은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하자 대신들은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졌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임사홍은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그는 성종 때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사림을 싫어했다.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세력과 잔여 사림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사건을 들추어 낸다. 윤씨의 폐출 경의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 한다. 우선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 귀인과 정 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 보내 사사시켰다. 병중에 있는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3일 만에 죽게했다.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김굉필 등 10여명이 사형당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남효은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김처선 등 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했다. 이처럼 벌어진 이 갑자사화의 희생자의 규모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 간의 정치투쟁 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어지는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 제11대왕 : 중종 1488 -1544년. 재위: 1506 - 1544년11월. 집권 38년2개월. 57세 사망.
●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중종반정: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축이 돼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 하는데 성공했다.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는 이들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 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홍문관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시과, 사가독서,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세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개혁적인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가고있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 해서 훈구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사림세력을 숙청 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나라의 민심이 조광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 趙를 분리한 글자 이므로 조씨가 왕이 되려 한다는 뜻이었다.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 해했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다 훈구파가 영의정, 좌이정, 우이정 등에 임명되자 곧 사사 되었다. 이 사건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테타적 성격이 짙다. 중종의 정치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렸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 단경왕후 신씨(1487 -1557년) :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다.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
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 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진다. 자식은 無 71세 일기.
● 장경왕후 윤씨(1491-1515년) :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세자「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 문정왕후 윤씨(1501-1565년) :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 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했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 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 들의 불만을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지나친 정권 욕에 불만을 품고, 신진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 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히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조정을 패권다툼의 장 으로 몰아갔던 그녀는 희대의 악후였다. 그녀는 1남4녀 를 낳았으며 35세에 명종을 낳았다.
● 조광조 : 그는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성균관에 입학 했다.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 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감찰, 예조좌량을 역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1517년 그는 그 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 하기에 이르렀다.
첫째 : 향약의실시.향약은 성리학적 이상사회. 즉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 시켜 왕도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
다.
둘째 : 현량과의 도입.(인제 천거제도) 과거 제도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이 곳을 통하여 등장한 인물은 신진사림파가 많았는데, 그들은 조광조 의 추종학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중종이 밀리고 말았다. 훈구 대신들의 막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의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던것이다. 이에 훈구 세력 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인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을 한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 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을 감행하였다. - 이것이「기묘사화」이다 -1519년
이로써 4년 동안의 조광조의 정치개혁은 막을 내리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 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 을 끼쳤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 1519년(중종 14) 남곤·홍경주 등의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의 신진 사류가 축출된 사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우를 얻은 신진 사류는,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여,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또 중종반정 공신들을 중용함으로써, 그들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결국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사사되고,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 김구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 ·김정국 등은 파직되었다.
● 서경덕(1489-1546년) : 호는 화담. 그는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 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 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 김안국 등이 후릉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는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 황진이는 화담을 유혹하는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관계를 맺기도 한다.
■ 제12대왕 : 인종(1515-1545년. 재위 : 1544년 11월-1545년 7월. 집권 9개월간.31세일기.)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6세에 세자에 책봉되어 25년간 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인종의 모후인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만에 25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래서 그는 문정왕후 윤씨 손에서 자랐다.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었고 8살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철처한 금욕생할을 추구했고,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슬하 의 자녀는 없었다. 귀인 정씨는 정철의 큰누이이다. 인종은 30세에 즉위하여 31세에 죽음.
■ 제13대왕 : 명종(1534-1567년.재위 : 1545년7월-1567년6월. 집권 22년.34세일기로 죽음.)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명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대윤 -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
소윤 - 문정왕후 동생 윤원형 일파
※ 을사사화乙巳士禍 - 1545년 윤원형 일파는 윤임일파 등을 제거하기 위해 윤임이 성종의 셋째 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이를 구실로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세력들을 유배시켰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윤원형 일파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 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시대'가 도래 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자 그 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했다. 또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척 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장을 빼앗긴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 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빰을 때리기도 했다. 왕의 권위가 이 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사회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 밖에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백성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 마다 도적 떼가 난립하였다. 이시기에 임꺽정이 나타난다. 이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에서 밀려 나고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 되었다가 자살 하였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했다.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13세에 죽었다. 때문에 후사를 남기지 못해 중종의 9째 아들 덕흥군의 3째 아들 하성군(선조)이 이어 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출신인 방계혈족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 작서의 변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가 세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죽자, 왕의 총애를 받은 경빈 박씨는 자기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할 야망을 품고 있었다. 때마침 1527년 2월 세자(뒤의 인종)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東宮)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 등은 이것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의 짓이라 하여,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빼앗아 서인(庶人)이 되게 하였다. 1533년에는 모자(母子)를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1541년에 이 사건을 조작한 자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 인순왕후 심씨(1532-1575년) -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3세의 나이로 요절 했고 더 이상 후사를 잇지 못했다.
■ 제13대왕 : 선조(1552-1608년. 재위:1567- 1608년. 집권 40년 7개월. 59세.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부인 인순왕후 심씨는 명종의 유명과 종실의 천거에 의해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의 소생인 덕흥군의 셋째인 하성군을 양자로 받아들이고 수렴 청정했다. 이때 하성군의 나이는 16세였는데 인순왕후 심씨가 수렴청정을 했으나 선조가 정사처리에 능숙하고 친정할 능력이 있다는 판단에 따라 이듬해 17세가 되던 해에 편전을 넘겨주었다. 그는 즉위 초에는 학문에 증진하고 경연에 나가 정치와 경사를 토론하였으며 제자백가서 대부분을 섭렵하였다. 이에 따라 성리학적 왕도정치의 신봉자가 됐으며 훈구, 척신세력을 모두 밀어내고 사림의 명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황과 이이를 나라의 스승으로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으며 이황이 죽었을 때는 3일 동안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기도 했다. 척신들이 완전히 조정에서 사라지자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분당되는 사태에 직면했고 이후 동인과 서인으로 분리되어 당파 싸움을 하게 된다.
● 붕당정치
붕당대립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은 허엽이 영수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박순이 영수가 되어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우세하여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서인에 대한 강온 양론으로 갈라져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파되어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서인 ·남인 ·북인의 삼색(三色)이 형성되었다.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발 ·이산해 등이 중심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남인 유성룡은 화의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실각되자 북인 남이공이 정권을 잡게 되어 남인은 몰락하였다.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갈라져 대립하다가, 대북파가 옹립하는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권을 장악하고, 소북파를 일소하기 위하여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한편, 외척인 김제남과 그 일족을 처형하였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이러한 폭정은 오랫동안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에게 집권할 기회를 주었으니, 곧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바로 그것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며, 이이첨 ·정인홍 등 대북파 수십 명이 처형되고, 수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는 동시에 남인 이원익이 입상하게 됨으로써 남인이 제2의 세력으로 등장하여 숙종 때까지 100여 년 동안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즉, 효종이 즉위하자 서인 김자점은 역모로 실각하였으나 같은 서인인 송시열파가 등장하여 서인의 집권은 현종 초까지 계속되다가 현종 즉위 후 효종의 모후 조대비의 복상 문제를 놓고 서인의 주장인 기년설(1주년설)과 남인의 주장인 3년설(2주년설)이 대립하는 이른바 기해복제문제가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에 불과하던 것이 점차 당론으로 전환되면서 양파는 여기에 정치적 운명을 걸었고, 결국 서인의 주장이 채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 ·탁남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1694년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 ·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 ·이건명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로는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 ·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 ·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 ·벽파의 대립은 사도세자의 문제를 분쟁의 표면구실로 삼아 대립하게 되었고, 또한 남인의 시 ·벽파는 당시 전래하기 시작한 가톨릭을 믿는 신서교파와 반서교파로 분열되었다. 정조 때에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남인의 세력이 왕에 의하여 적극 옹호 ·신장되어 이가환 ·정약용과 같은 남인 시파의 명사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노론의 벽파가 대거 진출하여 1801년 신유사옥을 일으켜 사학일소라는 명목 아래 많은 시파의 가톨릭 교인이 변을 당함으로써 당쟁의 한 변형이 연출되었다. 특히 시 ·벽의 대립으로 인한 가톨릭교의 박해는 서학도 내지는 실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인을 말살시켜 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 서학이나 실학에 전념하게 된 이유는 숙종 때의 갑술환국 이래 남인은 대개 폐족원국의 무리가 되어 과거를 위한 유학이란, 그들에게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조선 중 ·후기 정치의 큰 특징이 붕단간의 대립에 있었으므로 붕당정치는 그 시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국왕의 위상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려는 연구 흐름도 나타나고 있으며, 붕당정치 대신 ‘사림정치’라는 개념으로 조선 중 ·후기의 정치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다.
동인 : 조식, 이황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주리학적 도학을 주장함. 구한말 - 위정척사파.
서인 : 이이, 성혼을 추종하는 기호학파. 주기철학을 주장. 구한말 - 개화파
이이가 죽자 파당으로 인한 대립은 점차 극심해져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1591년 세자책봉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동인이 득세하게 된다. 한편 1590년 왜의 동태가 수상 하다는 판단에 따라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왜국에 보내어 그 곳 동향을 살피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동인인 통신부사 김성일은 토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 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이 우세했던 까닭에 김성일의 주장대로 전란 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김성일 의 주장과는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감행 해 왔으니 이것이『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 13일). 7년 동안 지속된 임란이 끝나자 선조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 복구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쏟는다. 스스로 음식과 의복을 절제하여 사치를 배격 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고 양식을 절약하는 정책 을 실시해 민간경제를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한 민간의 사기를 돋우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전란 중 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공신을 녹훈하였다. 하지만 선조의 전란 복구 노력은 거듭 되 는 흉년으로 쉽게 효과를 볼 수 없었으며 조정은 당쟁이 더욱 악화되어 혼란이 점차 가속화 되었다. 결국 선조는 전란의 뒷수습을 채 마무리 짓지도 못한 채 1608년 59세를 일기로 41년 동안의 치세를 마감해야 했다. 의인왕후를 비롯해 8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14남 11녀 의 자녀를 얻었다. 선조는 임란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으로 인식 되고 있지만 명종 시대의 혼란 을 수습하고 외척 정치를 없앴으며 신권 중심의 정치를 구현한 뛰어난 왕 이었다.
● 인목왕후 김씨(1584-1632) :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0년 의인왕후가 죽자 1602년 19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이 당시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은 적통론에 입각해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 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 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들은 임해군을 제거하고 영창대군을 폐서 시켜 강화도에 유배하고 '7서의 옥' 이 발생하자 영창대군을 증살(烝殺)함. 또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인목왕후로 폐비시킨 뒤 서궁으로 유폐시켰다. 대북파의 의견에 따라 저지른 광해군의 이같은 패륜행위는 인조반정의 구실이 됐으며, 이에 따라 광해군은 폐위되고 인목왕후 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영창대군(1606-1614년) : 왕비에게서 태어난 유일한 적출이고 선조가 늦은 나이에 낳은 까닭에 부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래서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그를 세자로 책봉할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1613년 서양갑, 박응서 등 권력가의 7명의 서출들이 역모 꾸몄다 하혀 옥에 갇힌 이른바 '7서의 옥'이 발생했다. 이때 이이첨 등은 그들이 역모를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 하고 김제남이 이를 주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한 후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증살시킴. 광해군이 즉위하자 이이첨이 이끄는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그들은 선조의 유교를 염두에 두고 영창대군을 경계하였다. (선조는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 을 잘봐달라는 유교를 남김).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 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 놓기도 했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었다. 대신들은 암암리에 영창대군 지지파와 광해군 지지파로 분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처하자 현실적인 판단에 근거해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린다. 그런데 선위교서를 받은 영의정 유영경은 이를 공포하지 않고 자기 집에 감추어 버린다. 이후 이일은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파의 거두 정인홍, 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었고, 정인홍이 선조에게 이 사건을 알리면서 유영경의 행동을 엄히 다스릴 것을 간언 하지만 선조는 미쳐 결정을 내리지도 못하고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 넘어가고, 유영경은 인목대비 에게 영창대군을 즉위 시키고 수렴청정할 것을 종용하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킨다.
● 임해군(1574-1609년) : 선조의 서출. 장남으로 광해군의 친형이다. 그는 성질이 난폭하고 군왕의 기질이 없다 하여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그는 공공연히 왕위를 도둑맞았다고 생각 했는데, 1608년 선조가 죽자 세자 책봉에 대한 서얼 문제가 명나라에서 다시 거론되어 현장 실사를 위하여 사신이 파견되었는데, 임해군이 문제를 발생시킬 소지가 있다 하여 대북파의 주청 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죽임을 당했다.
● 정철(1536-1593): 그의 큰누이는 인종의 귀인 정씨였으며 둘째 누이는 계림군 유부인임. 이 때문에 그는 어릴 적부터 궁중 출입을 자주 하였으며, 명종과도 어릴 적부터 벗으로 지냄. 그가 27세에 별시문 과에 장원급제하자 명종이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좌의정 이었던 정철은 세자 책봉에 관 한 문제를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 할 것을 주청하려 했다. 또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상의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김씨 소생인 신성군을(임란 피난중 사망) 총애하는 것을 알고 인빈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 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 는 매우 진노했다. 이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정철은 경연장에서 건져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 하였다. 유성룡, 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등은 모두 강등 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때부터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지평이었는데 그가 이때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사건 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 하였지만, 그는 왕의 부탁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일에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그의 강직한 성격 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을 일삼치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그는 중앙 관직에 머물 때는 언제나 주변 사람들과 부딪치며 격렬한 논쟁을 일삼는 파당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히곤 했다. 하지만 그는 지방 수령으로써 자신의 임무에 충실했으며 뛰어난 관리적 기질을 발휘하곤 하였다 .관동별곡, 훈민가,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 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 임진왜란과 김성일
조선이 임진왜란에 대비하지 못한 이유를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김성일의 보고에서 찾는 경향이 많다. 서인인 정사正使 황윤길이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동인인 김성일이 당파심에서 달리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조보감’ 선조 24년(1591)조는 ‘일본에 갔을 때 황윤길 등이 겁에 질려 체모를 잃은 것에 분개’해서 김성일이 달리 말했다고 전한다. 풍신수길을 만날 때 황윤길은 뜰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성일은 국왕이 아니라 관백關白이니 당堂 위에서 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만난 후에 답서도 주지 않고 현재의 오사카 계시에 가서 기다리라고 하자 김성일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항의했다. 그러나 황윤길은 서둘러 떠났는데, ‘재조번방지’는 ‘억류를 당할까 두려워서’였다고 쓰고 있다. 겨우 받은 답서에 ‘조선국왕 전하’가 정승의 호칭인 ‘합하閤下’로 되어 있자 김성일 혼자 강하게 항의한 것도 그런 예다. 그러나 김성일은 유성룡이 “만약 병화兵禍가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인심이 놀라 당황할 것이므로 해명한 것이다”라고 전쟁 가능성을 시인하기도 했다. 전란의 조짐은 김성일의 귀국 보고를 뒤덮을 만큼 많았다. 풍신수길의 답서에 ‘명나라에 쳐들어갈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는 구절이 있어서 조야는 이미 충격을 받았다. 임란 1년 전 조선에 온 일본의 회례사 평조신은 침략을 공언했고, 이들을 접대했던 선위사宣慰使 오억령은 ‘명년(1592)에 침략할 것’이라고 정확히 보고했다. 그러나 선조를 비롯해 조정엔 전쟁을 생각하기 싫어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풍신수길이 미치지 않고서야 설마 공격하겠느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자신들은 전혀 몰랐다는 듯 김성일을 희생양 삼아 빠져나갔다.
● 임진왜란 (1592.4월-1597.11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등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이 소실되고 서적, 미술품 등이 없어지거나 약탈당했다. 또한 전란 때 명군이 지원한 데 대한 결과로 숭명사상이 더욱 높아지고, 그들에 의해 관우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한양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조선의 요청으로 대규모 원군을 파견 했고, 이 때문에 엄청나게 국력이 소모되었다. 그 때문에 국가재정이 문란해져 국방에 어려움이 초래되었다. 이러한 명의 국방력 약화는 여진족의 세력 팽창을 방치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여진족에 의해 명이 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 이순신 (1545-1598년. 서울 건천동 출생)
그의 할아버지는 이백록은 조광조 등의 소장파 사림과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 때 참화를 당함. 그 후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그가 태어날 즈음 가세는 많이 기울어 있었다.
■ 제15대왕 : 광해군 (1575-1641년. 재위 : 1608년 3월-1623년 3월. 집권 15년. 유배18년).
우여곡절 끝에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외교적으로는 실리적 외교론을 폈고, 내적으로는 왕권 강화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당쟁을 종식 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명분론에 입각한 서인들 의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결국 폐위되어 폭군으로 기억되고 마는 비운의 왕이 된다. 그의15년 재위 기간 동안 정권을 장악한 것은 대북파였다. 대북파는 정권유지를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이 때문에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과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을 전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623년 김류 ,이귀, 김자점 등 사대주의자들과 능창군의 형 능양군이(인조)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마침내 반정에 성공한 이들은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들의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사대를 거부하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했다는 것이었다. 폐위된 후 광해군은 강화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제주도에 이배 되어 18년 동안 생을 연명하다가 죽었다. 이기간 동안 그는 아주 초연한 자세로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쳐 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 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 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토록 지탱시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1641년 귀양생활 18년 만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폐비 유씨는 유배생활 1년7개월 만에 화병을 얻어 죽고 만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폐 세자와 세자빈은 두달만에 자살하고 만다.
● 김직재의 옥(1612년) :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 하기위해 어보,관인을 위조한 사건으로 대북파는 고문 과정에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소북파 인사 100여 명이 대거숙청 당했다.
● 허균 (1568-1618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침) : 시대를 변혁하기 위해 혁명을 꿈꾸던 사상가. 그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성장하여 학자와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이복형 허성은 당대 뛰어난 문장가이며 임란직전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 옴. 또 그의 동복누이 허난설헌은 황진이와 더불어 한국 여류문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릴 만큼 섬세하고 뛰어난 문장력을 과시 하기도 했다. 그는 26세 때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597년 문과중시에 장원 급제함. 1613년 '칠서의 옥' 란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서출인 서양갑, 심우영 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파에 가담했으며, 이이첨의 주선으로 형조참판에 임명되고 1615년 승문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기록이 잘못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으로부터 '그대의 충성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있다'는 찬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일약 형조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좌참찬이 되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해 성사시킨다. 그러나 그는 그 즈음 역모를 꿈꾸고 있었다. 서얼차별을 없앨 뿐 아니라, 신분계급을 타파하고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혁명을 꿈꾸었다. 그는 또 '북방에 오랑캐가 쳐들어왔고, 남쪽에서 왜구가 쳐들어와 남쪽 섬을 점령하고 대군을 상륙시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린다. 이 소문이 점차 미간 속으로 파고들어 효력을 발휘하자 그는 남대문에 이 내용을 붙이게 하였다. 방이 나붙자 장안은 온통 전쟁 분위기에 사로잡혀 도성민들 중 에는 황급히 피난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부하 현응민이 도성을 출입하다 불심 검문에 걸려 거사 계획을 발설 한 것이다. 현응민으로 부터 모반계획을 파악한 이이첨은 군사를 이끌고 허균집을 내사하여 그와 반란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허균을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에 처했다. 이로써 20년 가까이 준비해온 혁명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50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에 대해 총명하고 영리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인격에 대해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며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다섯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게 그러한 부정적인 소견 을 대변해 주고있다. 『홍길동전』『엄처사전』『손곡산인전』『장산인전』『장생전』『남궁선생전.등 을 남겼다.
■ 제16대왕 : 인조(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5월. 집권 26년2개월.55세를 일기)
● 인조 반정의 명분
첫째 명에 대한 의리를 져 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
둘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했다는 것.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파 들이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 했다. 그리고 청과 명에 대해 중립적인 외교로 실리를 취했으나, 인조는 대명 사대주의에 빠졌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릅을 꿇는 치욕을 당했다. 인조반정으로 정인홍, 이이첨 등은 사형을 당했고, 대북세력 200명 모두 숙청당함. 인조는 친명 사대주의를 표명하여 정국의 안정을 도모 하려 했으나 이괄의 난, 청의 침입 등으로 엄청난 혼란을 겪고 결국 청과 군신관계를 맺는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다. 이괄의 난은 인조가 한성을 버리고 도주했을 정도로 조선 조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내려옴으로써 변방의 수비에 허점이 생겨 후금의 침략을 용이하게 했다.
● 소현세자(1612-1645년) : 인조의 맏아들. 1637년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 하여 봉림대군 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 갔다. 그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외교관의 소임도 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짖거나 막기도 했다. 때문에 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그와 해결 하려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왔다. 1645년 그가 귀국 했을 때 인조는 철저한 친 청주의자로 돌아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청에서 가져온 서양 문물조차도 수용하지 않는 용렬한 모습을 보였다. 입국 후 두 달 뒤에 병으로 드러누웠고 3일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인조의 주치의인 이형익이 3차례나 침을 놓았고 그 뒤 3일 만에 죽었는데 그의 온몸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는 피가 쏟아 졌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에 따라 그가 인조에 의해 살해됐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세자빈도 이듬해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세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 가 두 명은 풍토병에 걸려 죽었다.
● 봉림대군 : 그는 청나라에 머물면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지내면서 그를 적극 보호 하였으며,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렬 반대하고 자신이 대신 가게 해 달라고 고집 하여 청의 요구를 막았다. 8여 년의 볼모생활 동안 많은 고통과 고생을 격으면서 반청사상을 정립시킨 그는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그해 9월 세자에 책봉되고,1649년 5월 인조가 죽자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17대 왕으로 등극했다..\
● 병자호란(1636년) : 1636년부터 정묘조약 때 맺은 '형제의 맹약' 을 군신관계로 개악하고자 하면서 황금과 백금일백냥, 전마 3천필, 정병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후금의 요구사항이 터무니없이 늘어나자 조선은 화의조약을 깨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개칭하고 태종은 황제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1일 청태종은 청군7만, 몽고군3만, 한 2만 등 12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쳐내려 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한편 청군은 12 월16일 남한산성에 도착했고, 청 태종은 1월1일 군사를 20만으로 늘려 남한산성 밑 탄천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후 별다른 싸움 없이 40여일이 경과하자 성안의 식량은 떨어지고 군사들은 피로에 지쳐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그러는 사이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고 인조 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의 요구사항은 총11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고,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 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곡물을 보낼 것 등이었다. 이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30일 인조는 세 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성으로 되돌아 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관계는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이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 것이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 동안 중국과 맺어 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 할 수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이괄의 난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 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관서 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고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기익헌, 구성부사인 한명련과 함께 가까운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자산·중화, 황해도의 수안·황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 날 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에서 대파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 나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 정충신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괄의 난 때 춘추관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불타고 말았다.
▣ 상평통보 [常平通寶] - 조선시대의 화폐.
1633년(인조 11) 김신국(金藎國)·김육(金堉) 등의 건의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고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했는데 결과가 나빠 유통을 중지하였다. 그 후 1678년(숙종 4) 정월에 다시 영의정 허적(許積), 좌의정 권대운(權大運) 등의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다시 주조하여 서울과 서북 일부에 유통하게 하였다. 그 뒤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 유통하게 했는데,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올 때까지 통용되었다.
■ 제17대왕 : 효종(1619-1659년.재위 : 1649-1659년 5월. 집권 10년.41세를 일기.)
소현세자와 함께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하며 반청 감정을 강하게 키웠던 효종은 왕으로 등극하자 곧 친 청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들 을 중용하여 북벌 계획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같은 계획은 끝내 실 행에는 옮기지 못했지만 그 덕택으로 국력이 강해져서 사회 안정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제1차 나선 정벌 : 1654년 6월 청은 조선 조총군사를 뽑아 영고 탑에 보내 줄 것을 요청했고 청나라 군사와 함께 나선 병력을 흑룡강 이북으로 후퇴시켰다.
제2차 나선(러시아)정벌 : 1658년 청은나선군이 10여척의 배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다가왔는데 청군은 겁을 먹고 감히 그들에게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화력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나선군은 흩어졌고 이후 흑룡강 부근에서 활동하던 나선군은 거의 섬멸됐다. 두 번의 나선 정벌은 조선군의 사기를 한껏 높여 이후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조선은 산성을 정비하고 군비를 확충하여 북벌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표류해온 네들란드인 하멜을 훈련도감에 수용하여 조총, 화포 등의 신무기 를 개량, 보충하게 하고 필요한 화약 생산을 위해 염초 생산에 매진 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효종이 확립한 군사력은 조선 사회의 안정 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 김자점의 옥 [金自點-獄]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즉위하여 효종이 되자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金尙憲 등 신하와 협의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이 지은 장릉長陵의 지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이에 청나라는 대군大軍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詰問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의 노력으로 일단 수습되었으나, 1651년(효종 2) 12월 진사 신호申壕 등이 다시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하였다. 효종이 인정문仁政門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 등을 심문하자 익은 공모한 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여 여러 명이 희생되었으며,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효명옹주의 어머니)이 그의 며느리인 숭선군崇善君의 아내 신씨申氏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나자 조귀인을 사사賜死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 제18대왕 : 현종(1641-1674년.재위 : 1659년-1674년. 집권 15년 3개월.34세 일기.)
현종 시대는 밖으로부터 외침이 일체 없었고 내적으로는 사회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로운 시대였다. 그러나 집권 15년 동안 예론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정쟁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예송(禮訟)론쟁 : 현종, 숙종 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 대비(인조의계비 장렬왕후)의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임 간의 논쟁을 말한다. 이 논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 문제인 것 같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예를 최고의 덕으로 여기던 성리학의 핵심 문제이다. 율곡학파인 서 인과 퇴계 학파인 남인간의 정권주도권을 둘러싼 이념 논쟁이었다. 이것은 표면적으론 단순한 학 문적 언쟁인 것 같지만 파고들면 효종의 왕위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묻는 것이었다. 당시 선비들에게는 목숨 을 걸만한 중요한 사안이었다.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석철이 왕위를 이어야 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세손이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다.
● 남인과 서인의 예론정쟁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쟁화 되었다. 이 무렵 조선 조정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세력과 인조의 중립에 정책으로 기용된 남인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인조, 효종 대에 남인은 주로 영남학파의 주리론을 주장하고 서인은 기호학파의 주기론을 주장하는 학문적인 대립을 벌였으나, 현종 대에 와서는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일 삼곤 했다. 예론 역시 처음에는 학문적인 대립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정쟁으로 확대된 사건이었다. 당시 조선의 일반 사회에서는 주자의 '가례'에 의한 사례의 준칙이 지켜지고 있었지만 왕가에서는 성종 때 제도화 된 '오례의'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오례의'에는 효종과 자의대비의 관계와 같은 사례가 없었다. 효종인 인조의 맏아들로 왕위에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그가 차남이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의 상중에 자의대비가 맏아들에게 행하는 예로써 3년상을 치렀기 때문에 다시 효종의 상을 당하여서는 몇 년상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에 직면하자 서인의 송시열과 송준길 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당연히 기년상(1년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인의 허목과 윤휴는 효종 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장남과 다름없기에 3년상이어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서인과 남인의 이 복상 논쟁은 극단적인 감정싸움으로 치달았고,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정쟁으로 확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정쟁은 지방으로 확대되어 재야 선비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 되었 다. 결국 효종의 상중에 일어난 이 논쟁에서 서인의 기년상이 채택됨으로써 남인의 기세는 크게 꺾였다. 그럼에도 남인의 반발이 심상치 않자 1666년 현종은 기년상을 확정 지으며 더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말 것을 엄명했고, 만약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포고문을 내렸다. 그러나 복상 문제는 1673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쟁점으로 부각 되었다. 이번에도 서인측은 효종이 차남이 라는 점을 강조하며 대공설(9개월)을 내세웠고, 남인측은 그녀가 비록 자의대비의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을 지냈으므로 큰 며느리나 다름없다면서 기년설(1년)을 내세웠다. 현종은 이때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의 의견에 따라 남인측의 기년설을 받아들여 자의대비로 하여금 기년 복상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서인은 실각하였고 현종 초년에 벌어진 예론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런데 1674년 8 월 현종이 죽자, 송시열은 다시 예론을 거론하며 자신의 종래 주장이 옳았음을 피력하다가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고, 이 후 서인 세력이 정계에서 밀려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 예론 정쟁 의 파장은 '현종실록'에 까지 영향을 미쳐 숙종 대의 경신대출척(1680년)이후 다시 집권한 서인에 의해 실록이 개수되는 일이 벌어지기까지 한다.
■ 제19대왕 : 숙종(1661-1720.재위 : 1674년8월-1720년6월. 집권 45년10개월.60세일기)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명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7세의 나이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고 1674년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곧바로 친정을 시작하였다. 숙종 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으나, 숙종은 비상한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왕권을 회복하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임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 한 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1688년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소의 장옥정(장희빈)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를 서둘러 원자에 정하려 했는데, 서인측이 정비 인현황후 민씨가 아직 젊어 왕자균을 원자로 확정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5일 만에 왕자 균을 원자에 정호하고 생모 장씨를 빈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의 노론측 영수 송시열이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며 왕자 균을 원자로 세우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 때문에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계 정치 인 들이 대거 유배되고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사사된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전 민씨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에 앉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1694년 노론계 김춘택과 소론계의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권력을 잡고 있던 민암, 이의징 등은 폐비 복위운동 관련자들을 모두 하옥하고 이들을 심문한 다음 숙종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중전 장씨에 대한 감정 이 악화 되어 있었고 민씨를 폐위 시킨 것을 후회하고 있던 중이라 오히려 민암 등의 남인을 축출해 버린다. 그리고 중전 장씨를 다시 빈으로 강등 시키고 폐비민씨를 복위시켰다. 민씨가 복원되고 빈으로 강등된 희빈 장씨는 중전으로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은 뒤에 희빈 장씨의 거처인 취선당 서쪽에서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어 다시 한 번 옥사가 일어난다. 희빈 장씨는 그 신당에 무당을 데려와 굿을 하며 인현왕후가 죽기를 빌었고, 이 사실을 안 숙종은 진노 하여 그녀를 자진케 했는데 이를 듣지 않자 사약을 내렸다. 이로써 소론은 세력이 대폭 축소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무속신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무고의옥’이라고 한다. 숙종은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 민씨폐위 사건에서 보듯이 애정의 편향이 심하여 그 것을 정치쟁점화 시켜 당쟁 을 격화시키는 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통치 전반을 평가해 볼 때 왕권 강화를 위해 고의적으로 반복하던 환국정치의 일면으로 해석 될수있다. 그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 권을 교체하면서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 숙종은 용사출척권을(왕이 정계를 대개편 하는 권한)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다. 붕당의 한계성 은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점을 적절히 이용하여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환국(換局)’ : 정국 전환을 뜻함. 이같은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시키며 조선을 안정시켰던 숙종은 1720년 약46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명의 왕비를 맞이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하고 나인출신 희빈 장씨와 무수리 출신의 숙빈최씨에게서 아들을 낳았다.
● 숙종의 업적
숙종의 업적경상도와 황해도까지 대동법을 실시하여 그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시킴으로써 광해군이래 계속된 세입일원화 계획을 완성시켰고 또 광해군 때에 시작된 양전 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강원도와 삼남 지방에 실시함으로써 서북 지 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화폐 주조 사업을 본격화하여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상평청, 호조, 공조 및 훈련도감, 총융청의 군영과 개성부, 평안, 전라, 경상감영으로 하여금 상평통보를 주조 하여 통용케 했다. 숙종 치세에 이루어진 이같은 경제 정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한편 국방과 군역 문제에서도 여러 가지 조치가 취해졌는데, 먼저 대흥산성, 황룡산성 등 변경 지역에 성을 쌓고 대대적인 도성 수리 공사를 하였다. 특히 이유의 건의에 따라 북한산성을 총체적으로 개축하여 남한산성과 함께 서 울 수비의 양대 거점으로 삼았다. 또한 효종 시대 이후 논란을 거듭하던 훈련별대와 정초청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신설하고 5군영 체제를 확립하여 임진왜란 이후 계속 추진하던 군제 개편 작업을 끝마쳤다. 이밖에도 양역이정청을 설치하여 민폐의 첫번째 요인이던 양역 문제의 해결을 꾀하기도 했는데 그 결과 군포 균역절목이 마련되어 이전에는 양전 1인의 군포 부담이 1필에서 4필까지 심한 차이를 보이던 것이 2필로 균일화됨으로써 민간의 부담을 줄였다. 이즈음 국방과 관련하여 영토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조선은 사군이 설치되었다. 폐쇄되었던 폐사 군지에 다시 2진을 설치하여 고토 회복운동을 벌였고 이 결과 압록강 연변에 조선인의 출입이 잦아지게 되어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 측과 협상하여 정계비를 세워 영토의 경계선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에도 통신사를 파견하여 막부 정권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 왜인의 울릉도 출입 금지를 보장받음으로써 울릉도 귀속 문제를 확정지었다. 문화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숙종 시대는 정치적으로 명분 의리론이 크게 성행하였기 때문에 명에 대한 은공을 갚는 다는 의미로 대보단이 세워지고 성삼문 등 사육신이 복관되었으며 노산군을 복위시켜 묘호를 단종으로 올렸다. 뿐 만 아니라 폐위되어 서인이 되었던 소현세자 빈 강씨를 복위시켜 면희빈으로 하는 등 왕권 강화 측면에서 왕실의 충 역 관계를 재정립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300여 개의 서원사우가 건립되고 그 중에 131 개소가 자연 폐쇄되는 서원 누수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 이 시기에는 '선원계보' '대명례집' '열조수교' 북관지' 등이 편찬되었으며 '대전속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신 전자초방' 등이 간행되었다.
● 숙종의 용사출척권
숙종은 이른바 용사출척권(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 정치로 왕권을 강화시켰던 왕이다. 그는 정 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급부 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그가 이같은 환국 정치를 구상하게 된 배경은 정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붕당의 한계성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가 꿰뚫고 있던 붕당의 한계성은 바로 군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파당은 반드시 몰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점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하면서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 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그는 환국 정치를 이끌어가면서 허적, 윤휴, 이원정, 송시열, 김수항, 박태보 등 수많은 뛰어난 신하들을 희생 시켰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자신의 부인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거나 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죽이기까지 했다. 숙종의 이같은 환국 정치에서 비롯된 사건들을 열거해보면,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 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1701년의 '무고 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 인현왕후 민씨(1667-1701년) : 예의가 바르고 덕성이 높아 국모로써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왕자를 낳지 못하여 왕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며 당시 소의였던 희빈 장씨가 왕자 균을 출산하자 정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당해야 했다. 1701년 소생 없이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녀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 인원왕후 김씨(1687-1757년) : 민씨가 죽자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 다음해에 왕비로 책봉.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경종이 죽은 뒤 대왕대비.
● 희빈 장씨(1659-1701년) :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시종으로 있다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 1686년 숙원이 되고 1688년 소의로 승격되었으며 이때 왕자 균을 낳아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다. 궁녀에서 후궁생활을 거쳐 왕비에 오르기까지 했던 희빈장씨는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숙종은 그녀의 처사에 분개한 나머지 이후로는 빈이 후비로 승격 하는 일을 법으로 금지해 버리기까지 했다.
■ 제20대왕 : 경종(1688-1724년. 재위 : 1720년 6월-1724년8월. 집권 4년2개월. 37세일기.)
경종은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이었다. 왕자 균은 생후2개월이 될 무렵 숙종의 정비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노론계는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태어 난지 두 달밖에 안된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하는 것은 부당 하다고 했다. 이에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워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면서 서인 노론측 대신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 균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빈으로 격상시켰다. 이에 송시열의 반대 상소가 올라오자 숙종은 이미 종묘사직에 고하여 원자로 확정 했는데도 이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고 지적하며 심하게 분노했다. 이 때문 에 송시열이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 균은 33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 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세제책봉이 거의확실 했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고 있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 이었을 것이다.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그것은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경종 시대는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고 이 때문에 경종은 재위 4년간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경종은 재위4년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두지 못했다.
■ 제21대왕 : 영조(1694-1776. 재위: 1724년8월-1776년3월. 집권 51년7개월. 83세일기.)
노.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 마져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 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 적인 사건이「사도세자사건」이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하게한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김씨, 수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 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 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을 하였다. 1762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세자를 제게 할 기회를 노리 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또 계비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 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굶어 죽게 하였다. 세자나이는 28세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思悼 라는 시호를 내리고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경제 정책에서는 균역법을 시행하고,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 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 이 고 구마를 가져와 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 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슬기롭게 극복 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하였으며 1776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 이인좌의 난 [李麟佐-亂]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少論)이 주도한 반란.
일어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密豊君 坦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流民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朴敏雄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 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 정순왕후 김씨(1745-1805) :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소생은 없고 영빈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 죽게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4년간 한다.(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
● 혜빈 홍씨(1735-1815년)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 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 사도세자(1735-1762년) :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영조가 40세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혜빈홍씨와 가례. 15세 때 서정을 대리함.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정순왕후 김씨, 숙의문씨 등이 그를 무고했다.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다.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의 일종인 조울증에 시달린 듯함.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 하자 영조는 분개했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하나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그 때 세자의 나이는 28세임.
■ 제22대왕 : 정조(1752-1800년. 재위:1776.3월-1800.6월. 집권 24년 3개월. 49세일기).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 로 입적되어 제왕수업에 들어갔다. 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이후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 가 대리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다. 정조는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시절을 보내야 했고 이 기간 동안「홍국영」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 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가 달라졌다.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 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을 대거 등용해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 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 직의 인사권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 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 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 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 되었다. 정조시대는 양반, 중인, 서얼, 평민 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 실학 :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정주 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회 체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수광, 유형원 등을 선구로 시작된 이같은 실학은 이익, 안정복, 박세당, 홍대용을 거쳐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에 이르러 집대성 되고 19세기 말의 개화 사상가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사회건설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다.
■ 제23대왕 : 순조(1790-1834. 재위: 1800-1834년. 집권 34년.)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수빈박씨 소생이다. 1800년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 해 6월에 정조가 죽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 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 하게 되었다. 그는 순조1년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오가작통법」을 썼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그가 죽 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는다. 1802년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다. 이때부터 영안 부 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로 넘어가고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 이라면 당쟁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 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 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과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농민들의 불만은 순조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19세기 중협 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다.
● 홍경래의난 : 세도정권에 의한 과거제도와 국가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 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 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과거에서 수 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 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 하지는 못했지만 이씨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 시켰다.
● 순원왕후 김씨(1789-1857) :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이다. 1800년(정조24년)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정조가 갑자기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 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년 왕비에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조씨 일문 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 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때 정순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쳐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을 지목하여 왕위 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하기 까지 60여 년간 이어진다.
● 효명세자(1809-1830) :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3세에 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는데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구현에 노력 했으나 대리청정 4년 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 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 제24대왕 : 헌종(1827-1849. 재위:1834-1849. 집권 14년7개월. 23세일기)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 이다. 3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린 관계로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 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된다.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위축 되면서 풍양조씨의 세력이 우세해 진다.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6년 동안은 풍양조씨 일문이 현달 하드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 시켰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모반사건 이 일어나는데,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준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두 모반 사건은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 왕권이나 정치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 증 이기도 하다. 헌종 12년 5월에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에 처해진다. 헌종은 재위 기간 동안 안동 김씨와 풍양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23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대비 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헌종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1849년 6월6일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죽었다.
● 신정왕후 조씨(1808-1890) [조대비] : 효명세자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을 못마땅해 하던 흥성군 이하응과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성군의 둘째 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효명세자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년2월 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은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1890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떳다.
● 효현왕후김씨(1828-1843) : 김조근의 딸로써 헌종3년 왕비에 책봉.16세에 죽음.
● 효정왕후홍씨(1831-1903) :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
■ 제25대왕 : 철종(1831-1863년.재위:1849-1863년. 집권 14년6개월.33세일기.)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이 철종이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이다. 1844년 헌종10년에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 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아들 원경이 사사 되고 둘째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 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 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어라 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철종이며 그 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 였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헌종의 6촌 이내에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1849년 왕위 즉위식을 올렸고 나이가 어리고 학문 을 연마 한 바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년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1852년부터 친정을 시작하나 정치의 실권 은 여전히 안동 김씨에게 있었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김병국이 훈련대장 김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안동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 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에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그 예이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시하고 술과 궁녀들을 가까이 했다. 이렇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 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있음.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정권은 정치적 견제 없는 조건 하에서 삼정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정책의 극에 달함.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 매직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 하였고 이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 철인왕후 김씨(1837-1878) : 1851년 15세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와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 제26대왕 : 고종(1852-1919년. 재위:1863년12월-1907년7월. 집권 43년7개월. 68세일기.)
고종은 1852년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년 12월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2세임. 대원군은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 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고종이 즉위하자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 시켰다. 이로써 대원군은 고종을 대신하여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지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그는 우선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 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한다.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재정을 충당했다. 민간의 부담을 줄이고자 무명잡세를 없애고,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 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토록 했다. 한편「대전회통」「육전조례」「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 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재정을 확립했으며 세도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한 정책과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 대원군은 더욱 쇄국정책을 펴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운다. 그러나 12세 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민씨가 노대신들과 유림을[최익현의 상소]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렸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대권을 장악 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 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병인양요-1766년.
신미양요-1771년
● 병자수호조약(1876): 고종13년에 일본과 맺어진 외국과의 최초의 수호조약. 부산. 인천.원산 등 3개항을 개항하도록 규정하는등 우리나라만이 갖는 일방적인 조약 이었다.운양호 사건으로 맺어짐.
● 임오군란(1882) : 구식 군졸에게 밀렸던 군량의 일부가 모래가 섞인 쌀로 주게 되자,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설치로 민씨일파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군졸들의 불평이 폭발하여 발생한 난으로 군졸 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민겸호 등 민씨 일파를 죽였다. 대원군은 왕명을 위임받아 난을 수습하고 재집권 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왕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왕후의 요 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생활을 해야 했다. 임오군란으로 일본과 제물포 조약이 맺어지고 이 조약으로 일본 경비군의 조선 내 주둔이 실현되어 그 세력 기반을 굳혔다.
● 갑신정변(1884) : 개화당의 김옥균. 박영호. 등이 중심이 되어 사대당인 민씨일파를 몰아내고 개화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일본의 힘을 빌어 우정국 낙성식에서 일으킨 정변으로 신정부는 청나라의 간섭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인한 일본인 피해자에게 배상금지불, 일본공사관 재건비 등을 지불케 하는 등 일본이 식민지적 기반을 닦는데 더욱 박차를 가한 조약이다.
● 동학혁명(1894) : 고종 31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되어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다. 혁명은 확대되어 봉건사회의 압박에 대한 농민 운동으로 변하여 기세가 걷잡을 수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세력들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조선에 진주 한 청.일 양 국군은 돌아가지 않고 일본이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 하였지만 청은 이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단독으로 조성의 내정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한 청 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 갑오경장(1894) : 일본의 강압 아래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혁신 내각에서 재래의 정치 및 여러 문물제도를 근대적인 방식에 의해 실시한 개혁이다. 일본은 민씨정권을 몰아내고 흥선 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 시킨 뒤 개혁 추진기구로써 군국기무처를 설치했다. 하지만 대원군은 일본이 바라는 것과는 달리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한다. 개혁의 내용은 청과의 조약을 일체파기. 개국기년 사용. 관제 개혁. 과거제 폐지. 은본위제채택. 사회계급 의 타파. 노예해방. 조혼금지. 신교육실시 등 이다.
● 을미사변(1895) : 고종 32년에 미우라 일본공사가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민비를 시해한 사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간섭을 더욱 강화하고 승리의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 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 이같은 정세를 감지한 조정은 배일 친러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년 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왕후를 시해하고 친일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한다.
● 아관파천(1896) :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친러정부가 집정하면서 열강에게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국가의 권익과 위신이 추락하고 국권의 침해가 심하여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선양을 요구하였다.
● 대한제국수립(1897) :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하였으며,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 을사보호조약(1905) :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이겨 포츠머드 조약에서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있어 서의 일본의 특권을 승인케한후 이토 히로부미는 강압적으로 이 조약을 체결케 하여 한.일 합방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주권을 잃고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두고 보호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을사오적 : 이완용.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권중현 등을 일컫는다.
● 헤이그 밀사사건(1907) : 을사보호조약에 의하여 일본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백성들이 극심한 착취와 탄압에 시달리게 되자,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들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상황을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이준.이위종.이상설)
● 한일합방(1910)
●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 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도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 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치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는 1863년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 정책 을 추진하였다. 한편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인한 천주교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 어려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 명성황후 민씨(1851-1895) :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며,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 하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씨는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 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그녀는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 이 정권을 장악하지만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3일 만에 정권을 되찾는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그녀는 시해됐고 시체를 불사르는등 천인 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 하여 서인으로 전락 시키도록 강요했다.
● 영왕(영친왕) 이은(1897-1970) : 고종의 넷째 아들이며 순종의 이복 동생이다. 1900년 8월에 영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그 해 12월 조선 총독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 갔다. 1920년 일본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되어 이 왕으로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 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 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 제27대왕 : 순종(1874-1926년. 재위:1907년3월-1910년. 집권 3년 53세일기.)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고 순종을 등극케 한다. 이후 순종은 일본의 탄압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 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세력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합병 한다는 논리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케 했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머물렀다. 일본은 그를 이 왕이라 불렀고 왕에 해당 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1926년 4월25일 53세 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감했다. 두 명의 황후를 맞이했으나 슬하 에 자식은 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27왕조 519년 역사의 막을 내린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국장일 을 맞이하여 6.10만세운동이 일어난다.
● 순정효 황후 윤씨(1894-1966) :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순종의 첫 번째비 순명효항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년12월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입궁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 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치 않았다 한다. 하지만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1966년 71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하였다.
- 고종의 자손들-
조선의 26대 임금이자 초대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황제는 모두 6남 1녀의 자손을 둡니다. 먼저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순종황제', 귀빈엄씨 사이에서 '영왕', 귀빈이씨 사이에서 '완왕'과 '육',귀빈장씨와의 사이에서'의왕', 귀인정씨와의 사이에서 '우',귀빈양씨와의 사이에서 '덕혜옹주' 등, 총7명의 부인에게서 6남 1녀의 자손이 있었지만 무사히 성장하여 결혼까지 한 자식은 3남 1녀에 불과합니다. - 고종의 장자(長子)였던 순종황제와 황제비인 순명효황후와 순정효왕후 사이에 자손이 없습니다. (즉, 조선왕조의 적통은 끊긴 것입니다.)
-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로, 왕세제이자 황태자였던 영친왕과 비(妃)인 일본의 황족 이방자 (마사코) 여사 사이에는 '진(晉)'과'구(玖)' 2명의 왕자가 있었지만 첫째 왕자 '진'은 막 돌을 넘기던 때 죽고었다. 현재 둘째 왕자 '구'는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생활하고 있으며 한때 '줄리아 뮬럭'이라는 미국 여성과 결혼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내 이혼하였고 슬하에 자식은 없습니다.
- 고종의 다섯째 왕자였던 의친왕의 자손은 매우 많았습니다. 의친왕이 워낙 활달한데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가지 않았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가셔서 외국인과의 사이에도 낳은 자손까지 있습니다. 의친왕은 부인을 여럿 거느리는 옛 왕가의 풍습도 풍습이지만, 남달리 수려한 용모 때문에 염문이 그칠 새가 없었습니다. 당호(堂號)가 내려진 부인만 7명이었고, 도합 14명의 여성에게서 모두 13남 9녀의 소생을 보았습니다. 의친왕의 자손들은 아주 많은데 현재 생존하고 계시는 분들을 살펴보면 "비둘기 집"이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로 알려진 의친왕의 11번째 자손'이석 공(公)'과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책을 쓰신 의친왕의 13번째 자손'이해경 옹주'등 여러 분이 생존해 계십니다. 몇 년전 궁중에서 궁중식으로 전통혼례를 치르겠다고 문화재청에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공주는 의친왕의 11번째 자손인 '이석 공(公)'의 장녀 이홍씨임
※ 조선시대 왕비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청주한씨 : 태조비-신의왕후 한씨
덕종비-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예종비-장순왕후 한씨[한명회딸]
성종비-공예왕후 한씨
인조비-인렬왕후 한씨
파평윤씨 : 세조비-정희왕후 윤씨
성종비-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
중종비-장경왕후 윤씨(대윤)
중종비-문정왕후 윤씨(소윤)
여흥민씨 : 태종비-원경왕후 민씨
숙종비-인현왕후 민씨
고종비-명성황후 민씨
순종비-순명효황후 민씨
청송심씨 : 세종비-소헌왕후 심씨
경종비-단의왕후 심씨
명종비-인순왕후 심씨
안동김씨 : 순조비-원경왕후 김씨(김조순의딸)
헌종비-효현왕후 김씨(김조근의딸)
철종비-철인왕후 김씨(김문근의딸)
[명벌, 명문, 갑족, 당내명문의 구분과 기준]
명문 선정에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와 문헌비고 및 상신록(相臣錄)과 문형록(文衡錄)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고려숭의전사와 각 문중의 족보기사를 참고로 하였다 상신(相臣)은 고려의 삼사(三師) 삼공(三公)과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삼사사(判三司事) 삼중대광(三重大匡) 중대광(重大匡)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중서령(中書令) 상서령(尙書令)과 조선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하고' 상신과 문형을 많이 배출한 순위로 명문의 순위를 분류하되 문장지문(文章 之門)을 우선으로 하였다. 순위의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영상(領相) 3점' 좌상(左相) 2점' 우상(右相) 1점' 문형(文衡) 1점으로 하여 다수점(多數點)으로 하되 동점인 경우는 고위직 다수순으로 하고' 비록 상신수는 많이 배출하였다 하더라도 보조상신(補助相臣)만 배출하고 영의정과 문형을 배출하지 못한 경우와 왕비의 세력으로 국권을 전횡한 경우는 후순위로 하였다.
《한국의 8대 명벌》
한국의 명벌이라 함은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양조에 걸쳐 장기간에 지속적으로 상신(相臣)과 문형(文衡)을 많이 배출한 문장을 우리나라 최고의 명벌로 규정하여 한국의 8대명벌로 선정하였다.
1위: 남양 홍씨
2위: 청주 한씨
3위: 파평 윤씨
4위: 안동 권씨
5위: 광산 김씨
6위: 경주 이씨
7위: 문화 류씨
8위: 여흥 민씨
[조선의 10대 명문]
1위: 전주이씨
2위: 안동김씨(신)
3위: 청송심씨
4위: 동래정씨
5위: 대구서씨
6위: 청주한씨
7위: 연안이씨
8위: 남양홍씨
9위: 파평윤씨
10위: 안동김씨
[조선시대 문과급제 10대 명벌]
1위 전주 이씨
2위 안동 권씨
3위 남양 홍씨
4위 파평 윤씨
5위 청주 한씨
6위 광산 김씨
7위 밀양 박씨
8위 연안 이씨
9위 여흥 민씨
10위 진주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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