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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0(현종 1).고려초의 무신.개요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을 일으켰다. 황해도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정변과 개혁정치고려 제6대 왕인 성종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고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정변을 일으켰다. 황해도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정변과 개혁정치
고려 제6대 왕인 성종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고 목종(穆宗 : 경종의 아들)이 왕이 되자, 이때 왕의 나이가 18세임에도 불구하고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됨에 따라 외척이 다시 등장했다. 앞서 천추태후와 추문을 일으켜 유배되었던 김치양(金致陽)도 다시 불려와 중용되었다. 김치양은 마음대로 정치를 하면서 1003년(목종 6)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 : 현종)을 후계자로 삼고, 궁궐 수비를 위해 서북면도순검사로 있던 강조에게 돌아와 지키도록 했다. 이때 세간에서는 왕이 위독하여 이 틈에 김치양 등이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하여 인심이 매우 흉흉했다. 이윽고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강조는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오던 도중,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도 평산)에서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한때 주저했으나 부하 장수들과 회의한 뒤 개경(開京)으로 가 목종을 퇴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태후와 그 무리들을 귀양보냈으며, 양국공(讓國公)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였다. 이어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새로이 관제개혁을 실시하여 국왕의 측근 보좌기구인 은대(銀臺)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했다. 이때 중대사(中臺使)에 올랐으며, 1009년(현종 즉위)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1010년 거란의 성종이 그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40만 대군를 이끌고 침입했다. 그러나 근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 제1차 침입 때 강동6주(江東六州)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가 송나라와 화친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통주(通州 : 지금의 평북 선천)에서 맞서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거란군에 포로가 된 강조에게 거란 성종이 자기의 신하가 되어 달라고 권유했으나 강조는 단호히 거절했으며,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한 이현운을 몹시 나무라고는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거란은 1018년 다시 침입해왔으나 강감찬에게 대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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