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가수 톱 7 연쇄 인터뷰 시리즈-이솔로몬>
아버지 죽음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
어려운 형편 돌파구로 찾게 된 노래
‘원래 내 것’ 없어...남 위해 가치있는 삶 추구
32살때 지금껏 경험 담아 TED 나가고파
TV조선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국민가수' 최종 3위에 오른 이솔로몬/ 장련성 기자
훤칠한 키에 작은 얼굴, 긴 팔다리의 모델 체형…. ‘누가 봐도 연예인 외모’라고들 했다. ‘네이버 나우’ 라이브 방송을 통해 공개된 유창한 영어 실력에 ‘해외 유학파’ ‘금수저’ 등 각종 추측성 댓글도 달렸다. 영어로 늘 주기도문을 외고 묵상을 한다. 영국식 영어가 주는 귀족적 악센트까지 더해지니 이솔로몬의 매력은 배가 됐다. 첫 방송에서 ‘시인’이란 직업 이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에, 이솔로몬에 대한 팬들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 그가 기자의 명함을 받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도 응모해 봤었는데….”
‘가수 이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더니 “문화부에 계시면 신춘문예 담당하시는 분도 다 같은 부서이신 거죠?”라며 기자에게 오히려 ‘취재’를 한다. 누가 ‘등단 시인’아니랄까 글 얘기부터 나눈다. ‘남들은 돈 안 되는 일에 왜 뛰어드느냐 비웃을진 모르지만, 남들 입장을 대변하는 글 쓰는 사람으로 가치 있게 살고 싶다’고 써내려갔던 그의 과거 속 글자취가 겹쳐진다. “문화부 계시면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시겠네요!”라고 말한다.
‘성찰…’. 이솔로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책이란 걸 모르고 살았어요. 한 마디로 열등생이었죠. 하하. 노래하고, 공차고…. 그런데 군대가서 였죠. 인생이 바뀐 게. 어느 날 운문으로 적어놓은 글을 보는데, 그렇죠, 시도 그 일부라 할 수 있죠, 짧은 몇 문장인데 엄청난 통찰력을 응집해 놓은 거에요. 아, 이런 게 깨달음이구나. 이런 게 성찰이구나. 그때 깨우쳤죠.”
23일 막을 내린 TV조선 ‘내일은 국민가수’ 최종 3위에 오른 이솔로몬은 “스물셋 군대 시절 세워둔 인생 목표가 ‘국민가수’를 통해 한층 다가선 것 같다”며 웃었다. “그 당시 10년 뒤, 32살이 됐을 때 TED(세계적인 강연 플랫폼)에 나가 영어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한 부모 가정에서, 가진 것 없이 자라도 스스로 믿고 노력한다면 적어도 나만큼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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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
지난 10월 7일 첫 방송. 이솔로몬은 등장부터 여성 마스터를 시작으로 “뭔지 모르겠지만 홀렸다”며 ‘동화’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아갔다. ‘대구 출신 집시 총각’이란 소개에 2016년 군대 상사의 권유로 시를 쓰게 돼 문예지 신인상을 받았다는 ‘시인’이란 직업까지 곁들여졌다. 그에게 “아직 의심이 든다”고 누차 말했던 김범수 마스터조차도 ‘숯 속의 진주들’ 팀 미션 공연에서 “정말 잘하네”라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최종 결승전에선 임재범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선곡해 폭풍 치듯 몰아치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시청자를 올려놓았다. 그가 열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한 노래, 이솔로몬이 참아왔던 눈물을 꾹꾹 눌러 목소리로 폭발시키는 동안 대신 눈물을 흘리는 건 시청자였다.
TV조선
마스터점수 1094점. 김동현에 이어 2위였다. 대국민 응원 점수 1위에, 관객점수 3위까지 포함 중간 순위 1위를 기록한 그였다. 최종 3위에 오른 그는 “1등이요? 제가 감히”라며 손사래다. “3억원이요?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기에 아예 생각조차 안 해봤는데요? 3억원을 받게 된다면, 글쎄요. 저를 위해서라면, 햄버거 하나 사먹겠죠. 하하. 국민가수 톱 7에 오른 것만 해도, 게다가 3위 자리까지 오른 것만 해도 정말 많은 분의 정성 덕분인걸요. 또 여기까지 오른 저에게도 칭찬해주고 싶어요.”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중·고등학교 시절은 실존적 방황과 내적 갈등으로 암울하기만 했다 말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는데, 참 열심이셨거든요. 근데 어느 날 어지럽다시는 거에요. 검진을 해보니 급성골수염 백혈병이라대요. 혈액암의 일종이라더라고요. 그 질병으로 12월 진단받으시고 이듬해 1월 25일날 돌아가셨어요. 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학창 시절 내내.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고 있는데 와 닿지가 않고 옆에 계속 계시는 것만 같고. 보통 대부분 슬프고 아프고 하는 게 온몸으로 발현이 되잖아요. 저는 그조차도 남은 식구들,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짐이 될까 봐 내색하지도 못했어요. 그게 아마 제 노래로 나온 것 같아요.”
이솔로몬 / 장련성 기자
◇홀로 견뎌낼 방법, 그것은 노래였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학창 시절. 그는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여건을 뻔히 알잖아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그저 다 포기해야 한다 생각했어요. 아마 제가 뭘 하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께서 어떻게 해서든, 쥐어짜서 여건을 마련해 주셨을지도 몰라요. 근데 어머니도 힘든데, 그걸 제가 아는 데 바라면 안 되죠.”
가정주부였던 어머니가 생활 전선으로 나가는 뒷 모습을 보며 아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써내려갔다. “‘스스로 네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잖아요. 무슨 일이 나더라도 홀로 견뎌낼 방법을 찾아보자 했어요. 그게 바로 노래였고, 가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돈을 내고 배울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처음엔 무작정 따라불렀다
“원리원칙대로 숨소리 하나까지 그대로 따라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가수분들의 창법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부르게 되더라고요.” 목회하시기 전 성악을 하셨던 아버지의 음악성은 이솔로몬에게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가수’라는 직업이 머릿속에 박힌 건 초등학교 때 TV에서 무대의 핀 조명을 보면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백색 조명이 가수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자려고 눈을 감는 데 어느새 자신이 핀 조명을 받는 무대 위 주인공이 돼 있었다. “심장이 덜컹덜컹하고 빨리 뛰더라고요. 너무 좋고 설레서요. 그래서 이게 내 길인 거구나 했지요.”
TV조선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겠다 마음먹고는 일단 노래 연습부터 했다. “혼이 나야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칭찬을 받으면 단점이 개선되는 스타일이거든요. 잘한다 하면 뭐랄까요, 진짜 잘해지는 느낌에 정말 열심히 하게 돼요. 그 맛에 취해 (스타라는) 헛된 꿈을 품고 엄청 연습했죠. 하하.”
먼데이키즈 김민수부터 바이브, 포맨 등 흔히 ‘남자들의 로망’이라 불리는 가창력의 신(神)의 노래는 다 따라불렀다. 좋아하는 가수에 따라 발라드부터 알앤비, 소울 등 장르도 확장됐다. 그러다 서울 서 가수 준비하다 XIA(시아) 준수의 ‘가지마’ 노래를 듣고는 너무 깊게 와 닿았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요. 1년 넘게 시아준수 님의 노래만 계속 불렀던 것 같아요. 자면서도 중얼중얼할 정도였으니까요. 한참 지나니까 그분의 발성을 자연스레 카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박효신 님의 노래를 따라부르게 됐는데, 부르면 부를수록 제 부족함이 드러나는 거에요. 준수님 카피할 때도 부족하다, 고치자 하며 계속 부르고 또 불렀는데, 박효신 님 노래를 부르면서 어느 날 무릎을 철썩 치게 됐죠. ‘내가 가져야 하는 건 힘이다.’”
중학교 때부터 스무살 넘을 때까지 재즈, 발라드, 알앤비 등 따라부르면서 발성 기교 등 노래 기법에 대해 스스로 배우고 깨쳐 왔지만, ‘노래의 근본’부터 파헤친 계기가 됐다. 대학 진학 대신 스무살에 서울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오디션에 합격했다. 5인조 아이돌 그룹을 만든다 했다. 백댄서로 한두 번 무대를 경험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무대는 나서보지도 못하고 회사의 재정 문제로 팀이 1년여 만에 해체됐다.
“좋은 결실을 맺은 건 아니지만, 노래하면서 보낸 10년이 헛된 건 아니었구나 생각했어요. 이때 까지 연습해온 것 덕분에 서울에 올 기회도 잡았고, 그 당시 다른 엔터사에서도 면접 보자는 얘기를 여러 곳에서 들었어요. 음악은 꾸준히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데, 누군가 인정해주기도 하고, 이렇게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래도 잘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이솔로몬 / 장련성 기자
◇”연대장님이 건넨 ‘넌 훌륭한 시인이 되겠다’ 한마디가 인생 바꿔”
이솔로몬은 “군대에서 인생의 행로가 또 한 번 바뀌었다”고 말했다. 서울서 가수 데뷔가 무산된 뒤 대구로 다시 내려왔다. 자립해 다시 가수에 도전할 수 있는 돈을 벌고자 핸드폰 조립 공장에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 영장이 나왔다. 10일 만에 입대했다. “그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입대하게 됐어요. 중·고등시절은 ‘열등생’으로 우울하고, 어쩌면 비참하게 보냈으니 격렬하게 내 자신을 바꿔보고.싶다는 의지가 있었죠.”
강원도 화천에서 운전병을 맡았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생 시절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예천, 영천, 포항 등지를 옮겨 다니긴 했지만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될 지는 몰랐다. 기왕 운전대를 잡았으면 최고의 운전병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제대 뒤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군 생활을 시작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학창 시절 때는 책상에 앉아있는 습관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았거든요. 공부도 잘했을 리가 없고, 공부하는 습관도 들지 않았고….한 마디로 열등생이었죠. 축구 좋아했지만 정말 잘하는 애들에 비하면 열등생이었고, 농구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인생 열등생이 되고 싶진 않았어요. ‘제가 한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보자’면서 스스로를 시험대에 놓았죠.”
군에서 처음 시도한 건 배식받는 량을 조절하는 것. 어느 지점에 배가 불러 고통스러워 지면 그 분량 이상 먹지 않는 것이다. 그 약속을 제대할 때까지 지켰다. 군에서 안 먹고, 안 자는 건 상상도 못할 일. 게다가 1호차 운전병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몰래 사흘을 남몰래 식사도 거르고 잠도 줄였다. 인생 다이어그램을 그려 자신이 좋아했던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줄줄이 정리해 나갔다.
“마지막까지 교집합을 찾다 보니 최종적으로 남은 게 ‘소통’이더라고요. 제가 여지 껏 음악을 좋아했던 것도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그 느낌이 소통 될 때 희열을 느꼈던 것이거든요. 소통을 제대로 하는 역할을 해낸다면 인생이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소통을 ‘키워드’ 삼았어요. 그날이 3월 6일에서 8일까지였어요. 수첩 달력에 ‘내 인생이 변한 날’이라고 써 놓긴 했는데, 그렇다고 그 날짜가 될 때마다 무언가 홀로 기념을 한 건 아니고요.(웃음)”
모든 필연을 만드는 우연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그날도, 모든 우연의 연속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자신의 목표를 ‘소통’으로 정한 날 자신이 모시기로 한 연대장의 회의가 길어졌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에게 연대장은 ‘기다림’이란 단어를 꺼내 들었다. 기다림을 주제로 글 한 편 써보면 어떨까 하는 권유였다.
“그날 퇴근도 안하고 밤늦게까지 기다림에 대한 시를 적었죠.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기까지 그 긴 기다림은 얼마나 간절한가. 밤이 다시 아침을 맞이해 밝음을 되찾을 때까지의 성숙한 기다림은 축복이다’ 이런 내용의 시를 적어서 연대장님께 보여드렸거든요. 연대장님이 굉장히 선비 같으신 분이세요. 글자도 삐뚤빼뚤, 맞춤법 띄어쓰기도 제대로 안 맞는데, 그걸 보시고는 굉장하다고, 훌륭한 시인이 될거라 칭찬해 주셨어요. 정말 큰 격려가 됐죠. 제가 시를 쓰면 그걸 프린트해서 코팅해 차에 붙이고 다니실 정도셨죠. 저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썼구요.”
하지만 아무리 써도 한계가 있었다. “마음먹고 인생을 다르게 살아봐야 겠다 했죠. 전역할 때까지 9개월 남은 동안 100편의 시를 쓰고 100권의 책을 읽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또 소통을 하자면 외국어도 필요하기 때문에 영어를 해야겠다 했죠. 친구들한테 들으니 원서를 한 시간씩 소리내서 읽으면 영어가 들리고 말할 수 있다 해서 단어 뜻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면서 무작정 매일 한 시간 씩 원서를 읽어나갔죠. 결국 제대할 때 100편 넘는 시를 쓰고, 100권 넘는 책을 다 읽었어요.”
이솔로몬 / 장련성 기자
◇1년에 책 1000권 읽기, 매일 글쓰기, 원서 외우기
이솔로몬은 제대 뒤 2016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종합예술지 ‘예술세계’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시인’이란 호칭이 붙는 게 그토록 부끄러울 수 없다고 했다. “배움이 많이 부족하니 적절한 언어를 끄집어 내는 데도 한계가 있고, 응축해 내는 실력도 많이 부족하다 느꼈지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도서관에서 새벽 서 너시까지 책을 읽었다. 1년간 1000권 읽기, 매일 글쓰기를 목표 삼았다. ‘이것도 못하면 넌 인간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다.
<군대 시절부터 매일 외신이나 영문판 신문 등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원서를 하루에 최소 한 시간씩 읽으며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다는 이솔로몬. 촬영=최보윤 기자>
2017년 12월에 접어드니 읽은 책이 930권을 넘어섰다. 그 뒤로도 계속 글을 썼다. 지금껏 다섯 권 분량의 책을 썼다. 그 중 하나가 지난해 7월 출간된 ‘그 책의 더운 표지가 좋았다’다.
‘네이티브’처럼 하는 영어구사도 마찬가지다. 하루 한 시간씩 읽던 원서도 어느 날부터는 영어 대본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정말 100번도 넘게 본 거 같아요. 통째로 다 외워버렸죠. 그 뒤에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의 대사는 있는 대로 외웠죠. 노팅힐, 러브 액추얼리...그러다 ‘마법의 560문장 듀오’란 책이 있거든요. 그 책을 통해 계속 말하기 연습도 하고, 나중엔 외국인 친구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자연스레 익혀갔지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통역요원으로도 선발됐다.
<제대 뒤 영어 공부를 계속 하다 영국식 영어에 빠진 계기를 이야기 하는 이솔로몬. 촬영=최보윤 기자>
이솔로몬이 최종 결승 ‘인생곡’으로 택한 임재범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일찍 혼자되신 어머니를 위해, 또 오랜 기간 우울했던 그의 삶의 담은 이야기이자 힘든 길을 걷고 있는 모두에게 힘을 주고 싶어 선택한 곡이다. ‘너의 손을 붙잡고 끝없는 폭풍 속을 이 거친 파도 속을 뛰어들 자신이 있어…’라는 가사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고.
“격변하는 파도의 흐름 끼리 부딪히는 그 깜깜한 밤을 헤메다 어느 바다 위에서 눈을 뜬 제 인생을 반추하는 듯했어요. 음악을 하고 글을 쓰며, 대학을 가지 않고, 사교육 한번 받아보지 않고도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해내면서 겪는 설움이나 분노 같은 것들을 담아내 응어리진 감정을 노래로 쏟아냈다 할까요. 묵묵히 지켜보신 어머니를 위해 ‘이겨내서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어요.”
그로 인해 얻어지는 영광이나 명성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했다. 비루하고 우울에 가득 차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강인한 의지를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했다. “10년씩 계획을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귀감이 되고 싶었어요. 간절함을 소명삼아 원대한 꿈에 한 발짝 다가서는 거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휴 그랜트가 주연한 ‘노팅힐’의 대사를 다 외웠었다며, 예전에 외웠던 것을 기억해 즉석에서 해보는 이솔로몬. 촬영=최보윤 기자>
이미 ‘큰’ 사람이 돼 버린 듯한 그에게 “이제 다 이룬 것 아니냐”고 했더니 “(김)유하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라며 웃는다. 팀미션 ‘숯 속의 진주들’로 또 준결승 듀엣으로 호흡을 맞추며 경연 함께 한 시간이 많아서인지 막내 유하만 생각하면 그냥 미소가 나오는가 보다.
“유하가요. 진짜 대단한 게 뭔 줄 아세요? 아니, 방송에는 안 보였을 텐데, 같이 있으면 ‘삼촌, 평소대로만 하면 돼’라면서 제 등을 두드려줘요. 하하. 사실 경연이란 게 어렵잖아요. 게다가 어리니까 투정할 법도 하고 짜증 낼 법도 한데, 저보다 늘 의연하니까. 유하보면 늘 배워요. 유하버스에 제가 탑승한 거죠. 하하”
김유하와 이솔로몬/TV조선
32살까지의 인생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때론 치열하게 다가서고 있는 이솔로몬. 그가 그리는 그 이후의 이솔로몬은 어떨까. “글쎄요. 아직 없어요. 그때는 그때 또 그려놓겠죠? 하하. 제가요. 일용직 뛰면서 페이트칠, 외장 철거, 내장 목수, 외장 목수, 도장, 벽지, 설비 철거, 택배 상하차 다 해봐서, 웬만한 건 다 잘하거든요. 이젠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릇이란 말 있잖아요. 제가 세상에 담아내고 그려낼 그릇의 역할이 어느 정도까지 주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어디든 쓸모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죽음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
어려운 형편 돌파구로 찾게 된 노래
‘원래 내 것’ 없어...남 위해 가치있는 삶 추구
32살때 지금껏 경험 담아 TED 나가고파
훤칠한 키에 작은 얼굴, 긴 팔다리의 모델 체형…. ‘누가 봐도 연예인 외모’라고들 했다. ‘네이버 나우’ 라이브 방송을 통해 공개된 유창한 영어 실력에 ‘해외 유학파’ ‘금수저’ 등 각종 추측성 댓글도 달렸다. 영어로 늘 주기도문을 외고 묵상을 한다. 영국식 영어가 주는 귀족적 악센트까지 더해지니 이솔로몬의 매력은 배가 됐다. 첫 방송에서 ‘시인’이란 직업 이외에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에, 이솔로몬에 대한 팬들의 궁금증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런 그가 기자의 명함을 받더니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도 응모해 봤었는데….”
‘가수 이솔로몬’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더니 “문화부에 계시면 신춘문예 담당하시는 분도 다 같은 부서이신 거죠?”라며 기자에게 오히려 ‘취재’를 한다. 누가 ‘등단 시인’아니랄까 글 얘기부터 나눈다. ‘남들은 돈 안 되는 일에 왜 뛰어드느냐 비웃을진 모르지만, 남들 입장을 대변하는 글 쓰는 사람으로 가치 있게 살고 싶다’고 써내려갔던 그의 과거 속 글자취가 겹쳐진다. “문화부 계시면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으시겠네요!”라고 말한다.
‘성찰…’. 이솔로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책이란 걸 모르고 살았어요. 한 마디로 열등생이었죠. 하하. 노래하고, 공차고…. 그런데 군대가서 였죠. 인생이 바뀐 게. 어느 날 운문으로 적어놓은 글을 보는데, 그렇죠, 시도 그 일부라 할 수 있죠, 짧은 몇 문장인데 엄청난 통찰력을 응집해 놓은 거에요. 아, 이런 게 깨달음이구나. 이런 게 성찰이구나. 그때 깨우쳤죠.”
23일 막을 내린 TV조선 ‘내일은 국민가수’ 최종 3위에 오른 이솔로몬은 “스물셋 군대 시절 세워둔 인생 목표가 ‘국민가수’를 통해 한층 다가선 것 같다”며 웃었다. “그 당시 10년 뒤, 32살이 됐을 때 TED(세계적인 강연 플랫폼)에 나가 영어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한 부모 가정에서, 가진 것 없이 자라도 스스로 믿고 노력한다면 적어도 나만큼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혈액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울고 싶어도 울지 못했다.
지난 10월 7일 첫 방송. 이솔로몬은 등장부터 여성 마스터를 시작으로 “뭔지 모르겠지만 홀렸다”며 ‘동화’ 같은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아갔다. ‘대구 출신 집시 총각’이란 소개에 2016년 군대 상사의 권유로 시를 쓰게 돼 문예지 신인상을 받았다는 ‘시인’이란 직업까지 곁들여졌다. 그에게 “아직 의심이 든다”고 누차 말했던 김범수 마스터조차도 ‘숯 속의 진주들’ 팀 미션 공연에서 “정말 잘하네”라며 그의 손을 들어줬다.
최종 결승전에선 임재범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선곡해 폭풍 치듯 몰아치는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시청자를 올려놓았다. 그가 열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위한 노래, 이솔로몬이 참아왔던 눈물을 꾹꾹 눌러 목소리로 폭발시키는 동안 대신 눈물을 흘리는 건 시청자였다.
마스터점수 1094점. 김동현에 이어 2위였다. 대국민 응원 점수 1위에, 관객점수 3위까지 포함 중간 순위 1위를 기록한 그였다. 최종 3위에 오른 그는 “1등이요? 제가 감히”라며 손사래다. “3억원이요? 원래부터 제 것이 아니었기에 아예 생각조차 안 해봤는데요? 3억원을 받게 된다면, 글쎄요. 저를 위해서라면, 햄버거 하나 사먹겠죠. 하하. 국민가수 톱 7에 오른 것만 해도, 게다가 3위 자리까지 오른 것만 해도 정말 많은 분의 정성 덕분인걸요. 또 여기까지 오른 저에게도 칭찬해주고 싶어요.”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중·고등학교 시절은 실존적 방황과 내적 갈등으로 암울하기만 했다 말했다. “아버지가 목사님이셨는데, 참 열심이셨거든요. 근데 어느 날 어지럽다시는 거에요. 검진을 해보니 급성골수염 백혈병이라대요. 혈액암의 일종이라더라고요. 그 질병으로 12월 진단받으시고 이듬해 1월 25일날 돌아가셨어요. 저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학창 시절 내내.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인지는 하고 있는데 와 닿지가 않고 옆에 계속 계시는 것만 같고. 보통 대부분 슬프고 아프고 하는 게 온몸으로 발현이 되잖아요. 저는 그조차도 남은 식구들,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짐이 될까 봐 내색하지도 못했어요. 그게 아마 제 노래로 나온 것 같아요.”
◇홀로 견뎌낼 방법, 그것은 노래였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을 학창 시절. 그는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설득시켰다. “여건을 뻔히 알잖아요.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그저 다 포기해야 한다 생각했어요. 아마 제가 뭘 하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께서 어떻게 해서든, 쥐어짜서 여건을 마련해 주셨을지도 몰라요. 근데 어머니도 힘든데, 그걸 제가 아는 데 바라면 안 되죠.”
가정주부였던 어머니가 생활 전선으로 나가는 뒷 모습을 보며 아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써내려갔다. “‘스스로 네 인생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누구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잖아요. 무슨 일이 나더라도 홀로 견뎌낼 방법을 찾아보자 했어요. 그게 바로 노래였고, 가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돈을 내고 배울 만한 형편은 아니었다. 처음엔 무작정 따라불렀다
“원리원칙대로 숨소리 하나까지 그대로 따라불렀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가수분들의 창법을 하나씩 분석하면서 부르게 되더라고요.” 목회하시기 전 성악을 하셨던 아버지의 음악성은 이솔로몬에게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가수’라는 직업이 머릿속에 박힌 건 초등학교 때 TV에서 무대의 핀 조명을 보면서. 어둠의 정적을 깨고 백색 조명이 가수의 머리 위로 내려앉는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자려고 눈을 감는 데 어느새 자신이 핀 조명을 받는 무대 위 주인공이 돼 있었다. “심장이 덜컹덜컹하고 빨리 뛰더라고요. 너무 좋고 설레서요. 그래서 이게 내 길인 거구나 했지요.”
본격적으로 가수가 되겠다 마음먹고는 일단 노래 연습부터 했다. “혼이 나야 더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칭찬을 받으면 단점이 개선되는 스타일이거든요. 잘한다 하면 뭐랄까요, 진짜 잘해지는 느낌에 정말 열심히 하게 돼요. 그 맛에 취해 (스타라는) 헛된 꿈을 품고 엄청 연습했죠. 하하.”
먼데이키즈 김민수부터 바이브, 포맨 등 흔히 ‘남자들의 로망’이라 불리는 가창력의 신(神)의 노래는 다 따라불렀다. 좋아하는 가수에 따라 발라드부터 알앤비, 소울 등 장르도 확장됐다. 그러다 서울 서 가수 준비하다 XIA(시아) 준수의 ‘가지마’ 노래를 듣고는 너무 깊게 와 닿았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요. 1년 넘게 시아준수 님의 노래만 계속 불렀던 것 같아요. 자면서도 중얼중얼할 정도였으니까요. 한참 지나니까 그분의 발성을 자연스레 카피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박효신 님의 노래를 따라부르게 됐는데, 부르면 부를수록 제 부족함이 드러나는 거에요. 준수님 카피할 때도 부족하다, 고치자 하며 계속 부르고 또 불렀는데, 박효신 님 노래를 부르면서 어느 날 무릎을 철썩 치게 됐죠. ‘내가 가져야 하는 건 힘이다.’”
중학교 때부터 스무살 넘을 때까지 재즈, 발라드, 알앤비 등 따라부르면서 발성 기교 등 노래 기법에 대해 스스로 배우고 깨쳐 왔지만, ‘노래의 근본’부터 파헤친 계기가 됐다. 대학 진학 대신 스무살에 서울에 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 오디션에 합격했다. 5인조 아이돌 그룹을 만든다 했다. 백댄서로 한두 번 무대를 경험했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무대는 나서보지도 못하고 회사의 재정 문제로 팀이 1년여 만에 해체됐다.
“좋은 결실을 맺은 건 아니지만, 노래하면서 보낸 10년이 헛된 건 아니었구나 생각했어요. 이때 까지 연습해온 것 덕분에 서울에 올 기회도 잡았고, 그 당시 다른 엔터사에서도 면접 보자는 얘기를 여러 곳에서 들었어요. 음악은 꾸준히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데, 누군가 인정해주기도 하고, 이렇게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래도 잘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연대장님이 건넨 ‘넌 훌륭한 시인이 되겠다’ 한마디가 인생 바꿔”
이솔로몬은 “군대에서 인생의 행로가 또 한 번 바뀌었다”고 말했다. 서울서 가수 데뷔가 무산된 뒤 대구로 다시 내려왔다. 자립해 다시 가수에 도전할 수 있는 돈을 벌고자 핸드폰 조립 공장에서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 영장이 나왔다. 10일 만에 입대했다. “그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채 입대하게 됐어요. 중·고등시절은 ‘열등생’으로 우울하고, 어쩌면 비참하게 보냈으니 격렬하게 내 자신을 바꿔보고.싶다는 의지가 있었죠.”
강원도 화천에서 운전병을 맡았다.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생 시절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예천, 영천, 포항 등지를 옮겨 다니긴 했지만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될 지는 몰랐다. 기왕 운전대를 잡았으면 최고의 운전병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제대 뒤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군 생활을 시작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진 않았다.
“학창 시절 때는 책상에 앉아있는 습관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았거든요. 공부도 잘했을 리가 없고, 공부하는 습관도 들지 않았고….한 마디로 열등생이었죠. 축구 좋아했지만 정말 잘하는 애들에 비하면 열등생이었고, 농구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인생 열등생이 되고 싶진 않았어요. ‘제가 한 말과 행동에 책임을 져보자’면서 스스로를 시험대에 놓았죠.”
군에서 처음 시도한 건 배식받는 량을 조절하는 것. 어느 지점에 배가 불러 고통스러워 지면 그 분량 이상 먹지 않는 것이다. 그 약속을 제대할 때까지 지켰다. 군에서 안 먹고, 안 자는 건 상상도 못할 일. 게다가 1호차 운전병이었다. 그는 인생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몰래 사흘을 남몰래 식사도 거르고 잠도 줄였다. 인생 다이어그램을 그려 자신이 좋아했던 일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줄줄이 정리해 나갔다.
“마지막까지 교집합을 찾다 보니 최종적으로 남은 게 ‘소통’이더라고요. 제가 여지 껏 음악을 좋아했던 것도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그 느낌이 소통 될 때 희열을 느꼈던 것이거든요. 소통을 제대로 하는 역할을 해낸다면 인생이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소통을 ‘키워드’ 삼았어요. 그날이 3월 6일에서 8일까지였어요. 수첩 달력에 ‘내 인생이 변한 날’이라고 써 놓긴 했는데, 그렇다고 그 날짜가 될 때마다 무언가 홀로 기념을 한 건 아니고요.(웃음)”
모든 필연을 만드는 우연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그날도, 모든 우연의 연속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자신의 목표를 ‘소통’으로 정한 날 자신이 모시기로 한 연대장의 회의가 길어졌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에게 연대장은 ‘기다림’이란 단어를 꺼내 들었다. 기다림을 주제로 글 한 편 써보면 어떨까 하는 권유였다.
“그날 퇴근도 안하고 밤늦게까지 기다림에 대한 시를 적었죠.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기까지 그 긴 기다림은 얼마나 간절한가. 밤이 다시 아침을 맞이해 밝음을 되찾을 때까지의 성숙한 기다림은 축복이다’ 이런 내용의 시를 적어서 연대장님께 보여드렸거든요. 연대장님이 굉장히 선비 같으신 분이세요. 글자도 삐뚤빼뚤, 맞춤법 띄어쓰기도 제대로 안 맞는데, 그걸 보시고는 굉장하다고, 훌륭한 시인이 될거라 칭찬해 주셨어요. 정말 큰 격려가 됐죠. 제가 시를 쓰면 그걸 프린트해서 코팅해 차에 붙이고 다니실 정도셨죠. 저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썼구요.”
하지만 아무리 써도 한계가 있었다. “마음먹고 인생을 다르게 살아봐야 겠다 했죠. 전역할 때까지 9개월 남은 동안 100편의 시를 쓰고 100권의 책을 읽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또 소통을 하자면 외국어도 필요하기 때문에 영어를 해야겠다 했죠. 친구들한테 들으니 원서를 한 시간씩 소리내서 읽으면 영어가 들리고 말할 수 있다 해서 단어 뜻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면서 무작정 매일 한 시간 씩 원서를 읽어나갔죠. 결국 제대할 때 100편 넘는 시를 쓰고, 100권 넘는 책을 다 읽었어요.”
◇1년에 책 1000권 읽기, 매일 글쓰기, 원서 외우기
이솔로몬은 제대 뒤 2016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종합예술지 ‘예술세계’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시인’이란 호칭이 붙는 게 그토록 부끄러울 수 없다고 했다. “배움이 많이 부족하니 적절한 언어를 끄집어 내는 데도 한계가 있고, 응축해 내는 실력도 많이 부족하다 느꼈지요.” 레스토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도서관에서 새벽 서 너시까지 책을 읽었다. 1년간 1000권 읽기, 매일 글쓰기를 목표 삼았다. ‘이것도 못하면 넌 인간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뛰어들었다.
<군대 시절부터 매일 외신이나 영문판 신문 등을 읽는 것을 시작으로, 원서를 하루에 최소 한 시간씩 읽으며 영어를 익히기 시작했다는 이솔로몬. 촬영=최보윤 기자>
2017년 12월에 접어드니 읽은 책이 930권을 넘어섰다. 그 뒤로도 계속 글을 썼다. 지금껏 다섯 권 분량의 책을 썼다. 그 중 하나가 지난해 7월 출간된 ‘그 책의 더운 표지가 좋았다’다.
‘네이티브’처럼 하는 영어구사도 마찬가지다. 하루 한 시간씩 읽던 원서도 어느 날부터는 영어 대본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너무 좋아서 대본을 정말 100번도 넘게 본 거 같아요. 통째로 다 외워버렸죠. 그 뒤에 휴 그랜트가 주연한 영화의 대사는 있는 대로 외웠죠. 노팅힐, 러브 액추얼리...그러다 ‘마법의 560문장 듀오’란 책이 있거든요. 그 책을 통해 계속 말하기 연습도 하고, 나중엔 외국인 친구들과 만나 대화하면서 자연스레 익혀갔지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통역요원으로도 선발됐다.
<제대 뒤 영어 공부를 계속 하다 영국식 영어에 빠진 계기를 이야기 하는 이솔로몬. 촬영=최보윤 기자>
이솔로몬이 최종 결승 ‘인생곡’으로 택한 임재범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일찍 혼자되신 어머니를 위해, 또 오랜 기간 우울했던 그의 삶의 담은 이야기이자 힘든 길을 걷고 있는 모두에게 힘을 주고 싶어 선택한 곡이다. ‘너의 손을 붙잡고 끝없는 폭풍 속을 이 거친 파도 속을 뛰어들 자신이 있어…’라는 가사가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고.
“격변하는 파도의 흐름 끼리 부딪히는 그 깜깜한 밤을 헤메다 어느 바다 위에서 눈을 뜬 제 인생을 반추하는 듯했어요. 음악을 하고 글을 쓰며, 대학을 가지 않고, 사교육 한번 받아보지 않고도 이렇게 살아갈 수도 있다는 걸 증명해내면서 겪는 설움이나 분노 같은 것들을 담아내 응어리진 감정을 노래로 쏟아냈다 할까요. 묵묵히 지켜보신 어머니를 위해 ‘이겨내서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어요.”
당신이 겪는 어려움,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로 인해 얻어지는 영광이나 명성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했다. 비루하고 우울에 가득 차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강인한 의지를 심어 줄 수만 있다면, 그만큼 가치 있는 삶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했다. “10년씩 계획을 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루어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귀감이 되고 싶었어요. 간절함을 소명삼아 원대한 꿈에 한 발짝 다가서는 거지요.”
<자신이 좋아하는 배우 휴 그랜트가 주연한 ‘노팅힐’의 대사를 다 외웠었다며, 예전에 외웠던 것을 기억해 즉석에서 해보는 이솔로몬. 촬영=최보윤 기자>
이미 ‘큰’ 사람이 돼 버린 듯한 그에게 “이제 다 이룬 것 아니냐”고 했더니 “(김)유하에 비하면 한참 멀었어요”라며 웃는다. 팀미션 ‘숯 속의 진주들’로 또 준결승 듀엣으로 호흡을 맞추며 경연 함께 한 시간이 많아서인지 막내 유하만 생각하면 그냥 미소가 나오는가 보다.
“유하가요. 진짜 대단한 게 뭔 줄 아세요? 아니, 방송에는 안 보였을 텐데, 같이 있으면 ‘삼촌, 평소대로만 하면 돼’라면서 제 등을 두드려줘요. 하하. 사실 경연이란 게 어렵잖아요. 게다가 어리니까 투정할 법도 하고 짜증 낼 법도 한데, 저보다 늘 의연하니까. 유하보면 늘 배워요. 유하버스에 제가 탑승한 거죠. 하하”
32살까지의 인생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때론 치열하게 다가서고 있는 이솔로몬. 그가 그리는 그 이후의 이솔로몬은 어떨까. “글쎄요. 아직 없어요. 그때는 그때 또 그려놓겠죠? 하하. 제가요. 일용직 뛰면서 페이트칠, 외장 철거, 내장 목수, 외장 목수, 도장, 벽지, 설비 철거, 택배 상하차 다 해봐서, 웬만한 건 다 잘하거든요. 이젠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릇이란 말 있잖아요. 제가 세상에 담아내고 그려낼 그릇의 역할이 어느 정도까지 주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어디든 쓸모 있지 않겠습니까?”
최보윤 기자 spic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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